김락운
'09년 10.7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보도한 MBC 「PD수첩」에 대해 제작진과
오역 의혹을 제기한 번역자 정지민씨(27·여) 사이에 5시간 동안이나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문성관 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정씨는“아레사 빈슨의 MRI결과를 CJD(크로이츠펠트
야코브병)라고 번역했는데 제작진이 임의로 vCJD(인간광우병)라고 자막을
넣었다”고 주장했고,
반면, MBC 'PD수첩'의 제작진 측은 "아레사 빈슨의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a variant of CJD(~의 일종)’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인간 광우병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하는데 정씨가 앞부분을 빼고 ‘CJD’라고 번역했으니
이것이 오히려 오역 아니냐”고 반문했다.
미국 쇠고기 광우병 소동은 우리 농촌 추간 농가는 물론, 정치권을 비롯
온 나라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지만,
우리 한우는 경쟁력을 키우는 등 자구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牛) !
어린 일곱 살 때,
맨 앞에서 나는 고삐를 잡고 그 뒤엔 커다란 암소, 맨 뒤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뒤 따라오고 계셨다.
강원도엔 다른 지역보다 비탈길도 참 많다.
삐뚤 빼뚤... 어렸을 적엔, 물론 커서도 그 비탈길에서 많이도 넘어져 무릎에
아직도 상처 아문 자욱이 지워지질 않는다.(다시 살펴보니 이젠 지워져 있다.)
그 날도 산비탈 길에 접어들자마자 소고삐를 잡고 앞서가던 내가 넘어졌다.
"일어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버지가 소리치신다.
그러나 아버지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평소처럼 벌떡 일어날 수는 없었다.
- 바로 뒤에서 커다란 암소가 바짝 따라오고 있었기에 -
순간 그 커다란 소가 내 다리, 허리, 등짝을 마구 짓밟을 것이 분명하여
어린 나로서는 이젠 죽었구나(아니 아직 죽음이 뭔지는 몰랐고 얼마나 아플까를 두려워
했을 것임) 하고...
그러나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몰라 엎드린 채 숨도 못 쉬고 있는데..
그러나 발이 네 개나 달린 덩치 큰 소가 내 머리칼 하나 안 건드리고
엎어져 있는 나를 잘도 피해서 좁은 비탈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휴∼, 어린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릴 때 이런 소의 보호를 겪고 난 후
나는 소에 대한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자란 것 같다.
초등하교 시절엔 낫질을 못 배운 상태에서도 소가 먹어야 할 꼴(소 먹는 풀을
꼴이라고 부름.)을 벨 때 우리 소들을 먹이겠다면서 어른들 따라 한 움큼씩은
베어 오기도 했다.
그때 벤 낫 자욱은 내 왼손 엄지 위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중학생 때엔 일찍 하교하는 날엔 자진해서 외양간 청소 후 풀을 베어
소들이 자는 바닥에 푹신하게 깔아 주었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아예 저녁 꼴 베는 일까지도 내 몫이 되어 있었다.
당장 내일 시험 보는 날임에도 어김없이 소 돌보기는 내 몫이었기에
자동적으로 골짜기가 엄청 많은 뒷산 쪽 어디(비석골, 산막골, 막고개, 방공호골 등
골짜기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음)에 소를 매어 놓았는지 물어보고는 지게에다
책 보따리를 매달고 산으로 올라가 송아지 포함 소 5마리를 풀어 놓아 맘대로
풀을 뜯어먹게 한 채 꼴 다섯 단을 일찌감치 베어 지게에 얹어
작대기로 받쳐놓고는 적당한 소나무에 올라가 자리 잡고 가져온 책을 풀어
시험공부를 했다.
땅바닥에는 불개미들이 저리 비키라고 깨물어대기 때문에...
나무 위가 그나마 안전했다.
* 지금은 시골에서도 사료에 의존한 소 사육 체제이지만
60∼70년대만 해도 대부분 산과 들의 잡풀,
그리고 탈곡 후 남은 볏짚 및 옥수수섶 등으로 사육했고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화목용 가정이 대부분으로 산에 나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
많은 풀이 제대로 자라고 있어 소를 산에다 매어 놓아 산 풀을 뜯어 먹게 했음.
아마 이렇게 키운 소가 진짜 한우일 것임.
그러다 붉은 노을이 지면서 글씨가 안 보일 쯤에 내 특유의 '음∼음머ㅇㅝ∼'를
외친다. 그러면 소들이 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멀리 있다가도 나에게 모여든다.
꼴지게를 지고 이 중 한 마리만 끌고 오면 나머지 4마리도 자동적으로
집까지 따라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음∼음머ㅇㅝ∼'를 아무리 외쳐도 소들이 모이질 않았다.
당황했다. 늘 그래 왔듯이 당연히 모여야 할 소들이 안 보였다.
못 들을 리도 없었다.
산골짝 메아리는 생각보다 멀리 퍼진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만 퍼져가고 있을 뿐, 날은 점점 어둑해져 가고.....
골짜기마다 등성이 마다 정신없이 헤매어 찾아 나섰다.
없었다.
소들이 뛰어오는 소리 대신 보금자리 찾는 산새들만 분주하게 지저귈 뿐,
한참 뒤에야 산자락에서 어미 소가 '음머ㅇㅝ∼'하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그러나 황급히 달려가 보니 어린 송아지는 쓰러져 있고,
어미 소는 어쩔 줄 모른 채 송아지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다.
쓰러진 송아지는 이미 거품을 물고 겁에 질린 커다란 눈깔을 껌벅이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나에게 아직 솟아오르지도 않은 뿔을 부비며 어리광 부리던 귀엽기만 한
송아지였는데,
이제 어미 옆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소들의 발자국을 따라 산 아래 밭을 보니 송아지가 뜯다 만 옥수수가 있고
밭주인들이 김을 맨 흔적도 있었다.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 아버지가 이런 현장으로 달려 오셨다.
그리고는 용길네 집으로 달려가 추궁하여 용길이 도앵 용석이가
옥수수를 뜯어먹는 송아지를 향해 돌멩이를 수없이 던져 쫓았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날 저녁,
용길이 아버지가 사죄와 함께 송아지 값을 가지고 와 건넸다.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자꾸 건네는데도 끝내 안 받았다.
그래서 그날 밤
양가는 의형제를 맺고 축하파티를 열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 소가 밤새도록 서러움을 토해 내고 있어 조용한 시골마을
구석구석 소 울음으로 메아리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양가 가족들은 친척으로 맺어지면서 막걸리 파티로 소 울음소리쯤이야
당연한 듯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임을 피해 외양간에서 어미 소와 함께 울었다.
그리고 다음 다음 날 밤,
자고 있다가 형수가 깨워 일어나 보니 왠 고기를 먹으란다.
쇠고기 - 그 당시 우리 산골 동네에서는 명절날과 동네 치성 드리는 날 외에는
고기 맛보기가 흔치 않았다.
(지금이야 시골에도 정육점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엔 장날마저도 귀했고,
있었다고 해도 비싸서 서민들로서는 감히 사먹을 엄두를 못내 뚱뚱한 사람을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인가!
자다 방금 깨어났어도 그 귀한 쇠고기이기에 남보다 한 점이라도 더 먹겠다는
듯이 우선 허겁지겁 맛있게 씹고 있던 중 그제야 우리 죽은 송아지가 혹시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발 아니길...그러나 그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가 먹고 있는 고기는 엊그제 죽은 우리 송아지였다.
분명히 파묻었다는데 동네 청년 몇 명이 작당하여 몰래 파헤쳐 요리한 것이란다.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아무리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급체!
소화제를 먹어도 침을 맞아도 그리고 비상수단으로 그전에 돼지고기 먹고
체했을 때 효과를 보았던 돌가루(개울가 연한 돌 두 개를 마주쳐 부비면 생기는
가루)까지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 이후 군대 가서 배고파 저절로 고쳐질 때까지 쇠고기를 먹기만 하면
체하여 그 흔한 '쇠고기라면' 조차도 못 먹었었다.
소(牛) !
나는 호적에 나이가 두 살 줄어 있어 또래들보다 군 입대가 늦었다.
그래서 입대 전에 근 1년간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을 잔치 집에서 엄청 술을 마셔 만취한 상태에서도
산에서 소꼴을 베어 짊어지고 삐뚤한 산등성 오솔길을 넘다가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었다.
만취 상태라서 정신도 혼미했었지만 너무 높은 데서 떨러져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산 속.
혹 꼴 베러 온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상태로서는 도와달라고
소리칠 기력조차 없었다.
얼마 후 겨우 눈을 떠 내가 떨어진 언덕 위를 올려다보니 나를 따라오던 소들만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안타깝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
- 그들로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는 네 발 달린 동물일 뿐이었다.-
얼마 후 그들마저도 내 통제에서 풀려나 어디론가 맘대로 가 버렸다.
난감한 가운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형님이 산등성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남은 기력을 다해 굴러 떨어진 위치를 알리고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었더니
"아직 잔치 집에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소가 얼마나 울어대는지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소들만 집에 와 있고 네가 없어
찾으러 와 보니 이렇게 돼 있구나."
소의 영리함.
옛날 얘기에 개가 술 취한 주인을 산불에서 구했다고 하지만
소도 주인을 구할 줄 알았다.
소(牛) !
나 군 생활 초기에 고향집에서 기르던 황소가 아버지를 들이받았다.
이미 노환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였지만 소를 외양간에서 내매고 들여 매는
정도 돌보기를 겨우 하시다가 성질 거친 황소에게 당하신 것이다.
노인들은 흔히 자신의 운명이 다 되었음을 직감할 때엔 병원도 마다하고
조용히 운명을 맞는다.
아버지가 그랬다.
이제 노환에다 소에게 떠받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면서 병원 치료를 마다하고
한 가지 두 가지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고 계셨다.
옛날에는 10.1일 국군의 날이 휴일이었고 다음 날인 토요일 오전은
지금처럼 휴무가 아니었지만 국군의 날 행사 참석자들은 휴무가 보장되고
일요일까지 합쳐 연 사흘 동안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지휘관 승인을 받아
모처럼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 병문안을 드리는데...
“너 잘 왔다. 내가 갈 날이 다가왔다.
가기 전에 마무리할 것이 있으니 잘 들어라.
너한테는 지난번에 집에 데리고 왔던 신부감이 이미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너 태어날 때 배내옷(갓난아기 첫 저고리)을 전하면서 딸을 낳게 되면
사돈 맺자고 약속한 적이 있어 이를 꼭 지키고 생을 마감하고 싶으니
이 애비 유언으로 받아들여 나 죽기 전에 당장 결혼 하거라!”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아무리 6·25때 한 방공호에서 피난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한 우정일지라도
자식에게 혼인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부모가 혼인을 결정하던 옛날이 아니잖은가?
당연히 거부했다.
막무가내의 유언이라도 전혀 이룰 수 없는 혼인이기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 옛날 소들과 함께 했던 뒷산으로 올라가 반나절이나 고민하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허망한 청춘을 원망했다.
얼마 전 휴가 때 가족들에게 소개시켜 혼전(婚前)임에도
한 방에서 재우기까지 한 처녀는 어떻게 하라고..
이제 와서 전혀 엉뚱한 대상과 짝을 맺으라니..
도저히 응할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지상명령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순하고 착하기만 하기에 도저히 아버지 명령에 도전한다는 것은 최대 불효이기에)
아버지에게 되돌아가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다.
잘 생각했다고 당장 하란다.
사흘 만에 약혼했다.
그래서 개천절이 약혼 기념일이다.(결혼기념일은 잊어도 잊을 수가 없는 약혼 기념일)
다음 해 3월,
'모친 위독 급래' 전보(그 당시 시골에는 전화도 없었던 것 같다.)를 받고 달려가
청춘 비관으로 술 퍼먹은 상태에서 전통 결혼식 주인공이 되어
지금의 아내와 평생을 함께 살고 있다.
- 황소가 아버지를 들이받지만 않았던들 그런 사돈 맺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나 했을까?-
소!
그들은 나를 구해 줬고,
나의 학비를 마련해 주었고, 이렇게 반려자까지 이어주었다.
* 60년대 당시 산골은 대체적으로 옛날부터 가난한 영세 농가들인데다
지역 내에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없어 도회지에 자녀들을 내보내 별도
하숙비까지 부담하지 않는 한 고등학교 진학을 대부분 엄두 낼 수가 없었다.
산촌 마을에서 교납금 보다는 그 비싼 하숙비를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키우는 소가 한두 마리 여유가 있어 진학할 수가 있었다.
꿈 풀이에 보면 소가 꿈에 보이는 것은 조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재작년에 형님가 나의 꿈에 소가 보이기에 휴가 때 아버지 묘소에 성묘차 가 봤더니
윗자리 할아버지 묘에 멧돼지들이 굴을 파 놓았다.
한나절이나 가족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원상 복구해 놓고는
내가 죽을 때 자식들에게 유언할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엊그제 추석 성묘 때에 자식들게 다짐해 주었다.
‘내가 죽거든 비석대신 소상(牛像)을 세워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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