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닐봉지에 버렸던 아들
락운강촌
불가피하게 불쌍한 자식을 버리고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산모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임신 때에는 감기약도 먹지 않는다는데 무슨 차 멀미약을 언제 먹었어?
도대체 제 정신이야?"
내가 화를 내면서 나무라자 아내는 나를 외면한 채 그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내가 한 말이 금방 후회가 되어 나 스스로 다음 말문을 이어가지 못한 채
한참 동안의 침묵 속에서 나름대로 괴로웠다.
- 나는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를 보자마자 '도대체 제 정신이냐?'고 윽박지르던
대신 '고생했어. 몸은 괜찮아요?’라고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우선 달래 주었어야
했는데.....
유산으로 인한 불안함과 속상함으로
이미 아내는 임신 초기 아기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 멀미약을
감히 복용했던 대가를 충분히 치렀기에
남편으로서의 할 일은 그 불안의 풍랑으로부터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왜?
아내에게 감동을 줄 좋은 기회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그 잘못을 꼬집어 아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을까?-
" 미안해. 방금 의사와 싸우고 오다보니 나도 모르게 당신에게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어요.
정말 미안해.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회식이 있어서 이런 줄도 몰랐어.
삐삐라도 치지 그랬어."
(당시는 휴대폰이 아닌 호출기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 아기는요?"
" .................."
어떻게든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데......
대답할 단어들끼리 서로 뒤섞이면서 입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이미 아내는 나의 메마른 침묵의 의미를 알아 차렸는지
글썽이던 눈물을 주르르 귓가로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나 슬펐다.
" 아기는 또 낳으면 되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우리 너무 상심하지 말자!"
내 손에 잡힌 아내의 손은 차갑고 식은땀만이 촉촉했다.
그날 나는 동기생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행주나루터 매운탕 집에서 만취한 채
완행버스를 타고 의정부 집에 도착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문이 잠겨 있었다.
물론, 집에 있어야 할 아내도 없고 네 살짜리 딸내미도 없었다.
당황해 하고 있는데 웃집서 우리 딸내미가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있다가
"아빠!" 하고 불렀다.
얼른 달려가 보니 웃집 아저씨가 빨리 병원부터 가 보라고 한다.
아내가 유산기가 있어 자기 부인이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데리고 갔단다.
당황한 채 병원에 도착해 보니 이미 의사들은 8개월 만에 유산된 우리 아기를
폐기처분해 버렸단다.
황당했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나는 의사들에게 도대체 보호자 동의도 없이
누구 맘대로 처분했냐고 따지면서 당장 데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나의 흥분 상태와는 달리 한 의사가 나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그 의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아기나 빨리 내 놓으라고 다그쳤다.
그 의사는 화가 잔뜩 나 있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 산모와 면담을 해보니 아기 뒷골이 생성되는 시기인 지난 6월 달에
차멀미 약을 드셨더군요.
(뒤로 알고 보니 어머니 생신을 맞아 고향에 가면서 복용했단다.)
그래서 아기가 뒷골이 없는 기형아로 조산되었지만 숨만 쉬고 있었을 뿐
사산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아빠의 동의는 없었지만 산모가 아빠 오기 전에 빨리 처분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조기 처분했으니 너무 노여워하지는 마십시오."
" 아, 조산되었으면 인큐베이터에서 기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 물론, 그렇게 하면 살릴 수는 있습니다만, 저 아기가 평생 거의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운동신경은 뒷골에서 통제하는데 뒷골이 없기 때문에 팔다리를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겁니다."
간호사들이 검은 비닐봉지를 가져왔다.
얼마나 꽁꽁 묶었는지 잘 풀리지 않자 가위로 비닐봉지를 잘라 개봉했다.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고, 팔다리를 파들거리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 저렇게 잘 움직이는데 무슨 운동신경이 마비됐다는 겁니까?"
" 아, 이것은 생명체로서의 본능일 뿐입니다. 자 보십시오.
뒷골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기는 정말 뒷골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고, 아내와 똑같이 닮아 이쁘기만 한
분명 고추달린 정상아였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말이 이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별의별 생각이 제각각 갈 길을 잃은 채 머릿속을 바쁘게 질주하다
이쪽저쪽 벽에 부딪히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 내 말 한 마디면 저 아이가 다시 비닐봉지에 버려질지,
인큐베이터로 옮겨질 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장애자로 키울 수는 없습니다. / 아니 장애자라도 이미 태어난 엄연한 인간
생명체이니 버릴 수는 없습니다. / 아니 저 아이가 커 가면서 부모에게 퍼 부을
저주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 과감히 버리겠습니다. / 역시 아닙니다.
뒷골이 없는 것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양쪽 집안이 다 뒤통수가 납작하니
아마 부모를 닮아 납작할 뿐일 수도 있으니 키우겠습니다.)
단 몇 초의 순간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엄청나게 긴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뱃속에 구겨 넣은 양주가 급하게 머리 쪽으로 역류하다 물렁한 각막(角膜)을 뚫고
나오려는지 앞이 잘 안 보였다.
의사와 간호사의 흰 가운이 마치 귀신인 양 나를 홀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마냥 망설이고만 있을 수가 없었기에 의사 귀신들에게 홀려
아직도 파들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아기를....
단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한 채 내 아들을 검은 비닐봉지로 보내고 말았다.
유산을 했을지라도 산모에게는 산후조리가 필수인데도
아내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기를 잃었다는 죄책감에서인지 조기 퇴원은 물론
양 부모를 비롯한 친인척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순진하면 멍청하지나 말아야 하는데...
나는 아내의 산후조리에 무심한 채 아내의 말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옆에서 보살필 생각도 않고 다음 날 아침 정상 출근했다.
근무하던 중 웃집 아줌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어쩌면 남편이 그럴 수 있냐, 도대체 남편이 맞느냐?"는 원망 서린 야단을
맞았다.
그제야 내 잘못을 깨닫고 그래도 고향 강원도 산골보다는
거리상 가까운 인천의 작은 처남에게 전화를 걸어 유산 사실을 알리고
장모님 좀 오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런 젠장!
장모님이 장인영감과 부부싸움 후 집을 나간 지 일주일간이나 귀가하지 않아
자기도 찾고 있단다.
고향 어머니는 지독한 차멀미로 이 먼 길을 올 수도 없고,
우리 형수님은 치매 걸린 아버지 병치레 간호만도 바빴다.
할 수 없이 정식으로 보고하고 병가를 내어 집으로 왔지만,
내 생전 산모의 필수인 미역국을 끓여 봤어야지,
웃집 아줌마에게 부탁하려 했더니 아내가 그 아줌마도 바쁘니
자꾸 신세 지지 말자면서 내 만류를 들은 척도 않고 자신이 직접 국을 끓이고
오히려 내 끼니까지 챙겼다.
그러면서 옆에 있어 주는 것만도 고마우니 그저 집에만 있어 달란다.
그렇다.
아기 잃고 단장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아내에게는 그저 남편이 옆에 있다는
'든든함'이 필요했다.
어떤 부부가 다투다 남편이 모질게 "당신 것 전부 갖고 나가라"고 소리치자
아내가 큰 가방을 열면서 내 건 당신 하나밖에 없으니 이 가방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듯이
아내에게는 남편 자체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음 날 행정과장이 미역을 사 들고 와서 우리 부부를 위로하고
우리 사원들이 모금했다면서 격려금을 전해 주고 갔다.
윗집 아줌마와 내 직장 동료애에 가슴이 뭉클했다.
친척이 있으면 뭐 하는가?
우리가 불행했을 때 어느 한 사람 달려와 주는 이 있는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처남도 와 보지 않았다.
초·중학교 동창생이라서 너무도 나를 잘 알기에 여자관계 복잡한 나와
자기 여동생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다가 끝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내가 오빠라도 나 같은 놈에게 동생을 주지 않았겠다면서
역지사지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동생이 유산을 하고 마음 고생하는데도...
나한테 직접 전화까지 받고서도...와 보지 않다니,
그건 정말 너무한 것이 아니냐?
그렇기에 웃집 아줌마가 고맙고 직장 동료들이 더욱 고마웠다.
그 후 2년이 지나 둘째 딸이 태어나고,
세월이 한참이나 더 흘러 그 아이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이상하게도 그 몸부림치던 아기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하필이면 첫째가 장애인 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장애인 아동들을 보살피며 가르치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들려 줄 때마다
그 이름도 없이 단 몇 분간만 이 세상 공기를 마시다
비닐봉지 속으로 사라진 아기가 자꾸 내 가슴을 후벼 판다.
한편으로는 첫째가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 동생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던 중
우연히도 그 장애인 센터 옆에 짓고 있는 아파트 입주에 당첨되어
입주했다.
거기서 살지는 않았지만 두 딸이 살기에 매 달 가 보면서
오가는 장애인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또 그럴 적마다 이미 근 30년 전에 내 아기를 버렸었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그 장애인 아기를 매정하게 버린 내 몰인정을 벌하기 위함이라면
이 인연을 감수해야 함을 자각하면서
이제야 고귀한 생명을 경시했던 원죄의 순간을 후회한다.
아니,
검은 비닐봉지에 버렸던 내 아들이
나를 장애인 복지센터 주변으로 안내한 의도에 따라
이제야 내가 무엇을 하면서 속죄해야 하는 지를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귀촌해 살고 있지만
불쌍한 우리 아기는
이 매정한 아빠 가슴에 가끔씩 나타나 꿈속을 괴롭히고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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