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추억

색바랜 솔검불 한 잎의 작별 인사

락운강촌 2012. 5. 29. 12:17

★ 색바랜 솔검불 한 잎의 작별 인사 ★

 


강촌 김락운

 

 

   지난 주 금요일,
 우리 회장님께서 저의 전직교육반 입교에 따른 송별 회식을 주관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1년이나 남았기 때문인지 작별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현직을 마감하는 날이란 의미이고 너무 고마웠기에
 건배 제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하였습니다.

 

  회장님, 저를 행복하게 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부임하신 후 100일 동안이 제 재직 33여 년 동안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무런 통제 안 받고, 읽고 싶은 책 읽고, 쓰고 싶은 글 쓰면서
  천국이 따로 없고나 했습니다.

 

  이제 내일모래 나가면 그런 생활 계속 할 텐데.... 하시겠지만,
  여기 옆에 앉아 있는 우리 가족이 글 쓰면 이혼하겠다고 하네요.
  제가 옛날에 한 번 뭐 좀 하려다 쫄딱 망했었는데,
  출판이니 뭐니 하다가 또 말아먹을 게 뻔하답니다.
 
  긴 세월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아내를 가장 필요로 하는 노년기를 앞두고
  결코, 이혼당할 수는 없기에 그저 낙향해서 진흙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족대로 민물고기 잡아 매운탕 끓여 먹으면서 조용히 살아 가렵니다.


  최근 게시된 엠키스를 보니까 CEO를 잘 모시는 방법으로 연보상의 법칙이 있더군요.
  연 보 상, 즉 항상 연락하고 보고하고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저는 지금까지의 재직생활을 헛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33여 년간 수많은 CEO를 모시면서
  그저 묵묵히 소임에만 충실하면 되는 줄 알고 CEO에 대한 연보상 법칙은커녕
  무슨 지적이나 받을까봐 되도록이면 눈에 안 띄고,
  되도록이면 간단한 업무적 대화에만 임했을 뿐이고,
  심지어 작년도에는 글 하나 게시판에 올리면서 지금까지 모셨던 회장님들의
  실수한 것들만 나열했다가 하마터면 괘씸죄로 불명예 처분을 받을 뻔 했습니다.

 

  기왕이면 윗분들로부터 인정받고 후배들로부터 존경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CEO들은 누구나 고독합니다.
  그렇기에 부하직원들이 늘 연락하고 보고하고 상의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이는 CEO 뿐만 아니라 모든 윗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참석해 주신 가족분들도 앞으로 시어머니가 되셨을 때
  사사건건 지 잘났다고 나서거나 친정에서 배운 생활방식만 고집하는 며느리가 좋을까요?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척 시어머니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며느리가 귀여울까요?

 

  뒷전에서 곰처럼 묵묵히 맡은 일만 수행하다 많은 인정을 받지도 못한 채
  이제야 앙쉬움을 안고 떠나는 저 같은 생활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 현직 생활이 창창히 남으신 여러분들은 항상 연보상의 법칙을 머리와 가슴에 새겨
  승승장구하시길 기원합니다.

   
  참석해 주신 가족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혹, '아내의 유혹'이란 드라마 보시나요?
  신애리가 장서희를 쫓아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어떤 남자가 바람을 폈다면 그 남편을 지키지 못한 부인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야.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다. 냉동보관을 하든, 방부제를 뿌리든 사랑이 썩지 않게
    니가 신경 써야 했던 거다."

 

    그렇죠. 고 최진실이 진실되게 말했었죠.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요.
    한마디로 남편을 잘 관리하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집에서는 포도주,
    특히 적포도주는 남편에서 먹이지 마십시오.
    요즘 중년 이상 심장 질환이 많은데, 이 적포도주가 심장병 예방 및
    백내장 예방에 특효라서 한끼 1,000kcal가 넘는 고열량 식사를 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심장병 사망률은 세계 최저라고 합니다.
   
    또, 주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토마토입니다.
    토마토는 준 만병통치약이라 할 정도인데, 특히 항산성화 효능으로 성인질환
    및 암 예방에다 특히 늙지 않는답니다.

 

    앞으로 중년이 지나 부인들은 애 두세 명 낳으면 주름살이 점점 늘어나고
    피부도 거칠어질 텐데 남편이 적포도주와 토마토를 장기 복용하여
    늙지도 않고 또 더 젊어진다면 90%는 바람나고 맙니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 여자 좋으라고 적포도주와 토마토 먹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말씀드렸는데, 결론은 적포도주와 토마토를 먹이든 말든
    부부가 밸런스 맞춰 희로애락을 늘 같이 하시길 바라는 의미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런 편지를 꼭 보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남편을 왕처럼 섬긴다면 너는 여왕이 될 것이다.
    만약 남편을 돈이나 벌어오는 하인으로 여긴다면 너도 하녀가 될 뿐이다.'라고요.

 

    옛날 저 젊었을 때, 어느 위분이 회식 중에 없어졌기에 화가 나서
    숙소로 쫓아가 보았더니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에게 왜 우리 불쌍한 00을 무릎꿇게 했냐고 따졌더니
    저녁 8시 귀가시간을 안지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편을 잘 관리해서 대통령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을까요?
    아내가 남편을 하인 취급하는데 대통령이 될 리가 없지요.
    대통령은커녕 겨우 과장으로 있다가 나갔습니다.
  
    여기 참석하신 선후배님들, 그리고 사모님들 여러분!
    남편을 왕으로, 아내를 여왕으로 받들어 모십시다.
    자, 우리 모두 왕과 여왕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건배를 제의합니다.
    '왕과 여왕님을 위하여!'

 

 예상도 못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저의 둘째 딸(예란)이 마이크를 잡더니 
 몰래 준비했던 '아빠에게 드리는 글'을 낭송하는데 
 그제서야 사실상 퇴임임을 실감하게 되더군요.

 

  -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여오는 그 이름입니다.

 

  -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 그리고 어려움이 있으셨겠지만,
    아버지이기에 참아야 했고,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도 아버지이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던 것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 가족들의 안전과 회사의 번영을 위해 모든 시련을 참아내셨기에
    오늘 더 크고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하시는 명예로운 퇴임을 맞이하여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회장님과 직원님들께 먼저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 아버지께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던 딸로서 앞으로 건실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고 어려움 없이 늘 강하고 자신만만하게 사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해 낼 수 있었던 매우 크고 든든했던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어린애마냥 늘 떼를 쓰고 요구하고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 하지만, 아빠의 그 큰 어깨만큼이나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색할 수 없는, 상의할 수 없는 홀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던 그 모습들을
    이제야 이 못난 딸은 깨달으면서 철없이 가출하여 아버지 어머니 흰머리 나도록
    속 썩여드렸던 불효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 오늘 이 자리를 통하여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이 못난 딸은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여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며,
    퇴임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저희 가족들이 채워들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 오늘의 퇴임으로써 몸 담으셨던 공직생활은 비록 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모습은 그 아름다우신 모습 그대로 제 2의 인생으로서 뜻 깊고 빛나는
    삶으로 이어지는 새 출발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 쑥스럽고 어색해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이 자리를 빌어 하게 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푸르름을 당당하게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토종 소나무를 살펴보면,
  다른 낙엽들처럼 화려하지도, 멋있지도 않은 색 바랜 솔잎이 짙푸른 후배 솔잎들을 위로 받들어
  그들 아래에 보일락말락 숨어 있습니다.


  다른 낙엽들은 바람타고 멀리 날아가지만, 바로 직하하여 지금까지 보살핌을 받았던,
  그리고 봉사해 왔던 소나무 뿌리 위에 자리하여 솔 검불로서 말없이 흙속 거름되길 기다리죠.

 

  -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골프를 칠 때 어깨와 팔에 힘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지만
    저는 아마 힘빼는 대신 일반인들이 보는 특수직 출신이란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데에 긴 세월을 보내야 할 듯 합니다.

 

  - 곧게 뻗은 다리에 늘씬한 몸매, 멋진 그물 무늬의 가죽에 약간 긴 듯한 목'의
    멋쟁이 동물이었던 기린이 지 잘 난 척하다 점차 외톨이가 되어
    결국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목이 길게 늘어나고 말았다는 교훈을 잊지 않고,
    환골탈태한 특수직 출신답게 겸손한 삶을 살아 가겠습니다.

 

  - 또한, 목구멍 가시를 빼주고는 상을 기다리는 학에게 사자가 해 준 말 한마디
    "내 입안에 머리를 넣은 위험한 상태에서도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게 평생
    자랑거리가 될 것"이란 의미를 되새기며, 

 

  - 이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등 뒤에 가려진 진실을 천천히 답습하는 한편,
    지금까지 저를 사랑해 주신 분들의 성원을 잊지 않고 더욱 깊은 인연을  쌓아 가겠습니다.

 

  몸은 비록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늘 여러 선후배님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가 얼마 전 블로그 '락운강촌'을 개설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광고도 않고,
  쑈킹한 내용이 없어서인지 오는 손님이 전무한 실정이지만,
  앞으로는 여유가 많기에 제 전원일기를 비롯한 생활 잡기를 올려 놓을 테니
  자주 방문하시어 댓글과 방문록을 채워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신 선후배 여러분!
  결코 고별사가 아니기에 이만 줄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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