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추억

어릴 적 아궁이에 대한 추억

락운강촌 2012. 5. 29. 12:07

어릴 적 아궁이에 대한 추억


강촌 김락운



 시골 새로 지은 흙집에 방 한 칸은 장작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이 아궁이에 활활 타는 장작불을 보고 딸내미들이

장작이란 것은 알겠는데 이 불 때는 장치가 뭐냐고 물었다.

  

 

“ 아궁이라고 한단다.”

“ 뭔 뜻이야?”

“ 뜻은 모르지만 예부터 그렇게 불러 왔던 명사 단어야.”


연탄, 석유, 도시가스, 전기 등 근현대적 연료에 의한

난방 속에서만 자라난 신세대들이 아궁이를 알 리가 없지.


하지만 이 딸내미들이 아기 적 기억이 없을 뿐이지

아장아장 걸음마 할 때에도 우리 산골 동네에는 여전히 아궁이가 많았었다.

- 아침저녁으로 집집마다의 굴뚝에서는 어김없이 긴 한두 줄기 연기가

  이리저리 부는 바람 따라 피어올랐고.....-


지금이야 동네마다 몇 집 안 남아 주로 노인들이 살고 있지만

나 어릴 적에는 마을 안 옹기종기...또는 듬성듬성 집들마다

식구들이 많아 득실거렸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밥 짓고 등 따습기 위해서는

때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에

가까운 민둥산엔 땔감나무들이 미처 자라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무하러 가자’의 나무한다는 뜻은

산으로 땔감 마련하러 가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뛰어갈 수 있는 임자 있는 앞· 뒷산이 아니라

적어도 십 리쯤 먼 산(대부분 국유림)으로 올라가야 장작으로 팰 수 있는

틍거지(통나무의 사투리?)를 만나 지게로 져 와야 할 정도로

땔감이 몹시 귀했다.


그 옛날 중학생 시절.

마치 지금 이 순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착각해 본다.


식구들이 많아도 이렇게 힘든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기에

아직 뼈가 여물지도 않은 겨울방학 맞은 소년임에도 당연히 따라 나섰지만,

거리도 멀고 익숙하지 않은 등지게에 통나무 서너 개를 지고 오느라 지쳐

오전 내내 겨우 한 짐이 고작이었다.


점심 먹고 피곤한 상태로 좀 졸고도 싶지만

아직 장작 패는 과정이 남아 있기에

매서운 날씨에 장갑도 없이 호호 손을 불어가면서

지금처럼의 전기톱이 아닌 완전 수동 톱으로 나무 틍거지를 자르고,

옛날 ‘마님!’하고 부르던 머슴 흉내를 내어 도끼로 장작을 팬다.


그러다 보면 뒷산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마당을 덮을 즈음

작두에 마른 옥수수 섶과 볏짚 등을 썰어 소여물을 끓인다.


아궁이 앞에서 타는 장작불을 쬐다가 그제야 몰려오는 피로에

깜빡 졸다보면 가마솥에서 허연 김이 구수하게 퍼져간다.

잽싸게 나무 갈고리로 여물을 뒤집고 콩 쭉정이나 등겨(왕겨를 벗겨낸 후

발생되는 부드러운 벼 속껍질 가루)를 섞어 한 번 더 끓인다.


평소엔 느긋하기만 하던 소들도 구수한 여물냄새엔 성질이 급해져

빨리 여물을 퍼 오라는 듯 머리를 마구 흔들며

뒷발로 바닥을 쿵쿵 쳐댄다.

커다란 눈망울엔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하고...


가진 자가 선심 쓰듯 끓여진 여물을 귕(길다란 소 통나무 밥그릇)에다

가득 퍼다 주고 나서 장작 타고 남아 생긴 뻘건 숯불에

가을에 주워 놓은 날밤에 구멍을 내서 굽는다.

(어른들로부터 전래된 밤 굽는 방법을 잊은 채 급하게 밤 껍질에 구멍을 안 내고

굽다가 뜨거워진 밤이 펑! 튀어나와 눈탱이가 밤탱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뜨거운 군밤을 후후 불면서 까 먹다보면

어느새 냄새를 맡고 달려온 멍멍이가 쫓아와 같이 먹자고 보챈다.

못 본 척한 채 혼자 먹고 있으면 두 앞발로 내 등을 퍽! 치고는

나도 와 있음을 알린다.


빠르게 흔드는 꼬리에 마지못해 아깝지만 한 조각 떼어주고는

아궁이에서 아직도 이글거리는 숯불을 불삽에 고무래로 긁어모아

질화로에 조심조심 담아 안방 부엌으로 옮긴다.

그래야 거기다 국을 끓이거나 고등어를 노릇노릇 구워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저녁 먹자마자 라디오 연속극 듣는 것도 포기한 채

피곤한 몸으로 꽤 오랜 시간 코를 골다가

다시 동쪽 하늘이 훤해지면...


아니 그 이전에 첫닭이 울면 다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이제는 식어버린 부엌에서 새로 불을 붙이기가 귀찮아

좀 더 자는 척하고 있으면 새벽잠 없으신 어머니가 나가

아궁이를 어느 정도 달구어 놓을 때쯤에야 방금 깨어난 듯 뛰어 나가서

“ 제가 해도 되는데 벌써 나오셨어요?” 어쩌고 하면서

어머니와 아궁이를 교대한다.


부뚜막 가장자리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반복되는 여물 끓이는 과정을 거쳐

숯불을 만들어 질화로에 담아 저녁때와는 달리 윗사랑 아버지 방에

넣어 드린다. 

그 방은 아침때쯤이면 구들(온돌)이 식어 서늘하다 화롯불을 갖다 놓아야

이불속 게으른 아버지가 기침(起枕)하셨다.


질화로, 우리 집 질화로는 거의 항상 신품이었다.

장날 새로 사와 봐야 며칠 못가서 아버지의 화풀이 도구가 되어

오싹 부서지곤 했기에 길들일 틈이 없었다.


흔히 부부싸움에 동원되는 것이 값싼 물건이었던 걸 보면

질화로는 값이 쌌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질화로 잿불 속에는 늘 감자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었고,

둘러앉은 아이들과 함께 바느질하는 어머니로부터의 옛날 얘기들을

함께 들었기에 질화로를 생각하면 마치 아직까지 간직하고나 있었다는 듯

그리운 추억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 옛 이야기에 이어 아버지가 화로를 내던지고

어머니가 바가지를 밟아 깨면서 싸우는...

지금이야 정겹기만 한 생생한 동영상도 보여 준다.


질화로도 아궁이에서 담아온 숯불과 잿불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


질화로의 은인인 아궁이!

이 아궁이가 얼마나 땔감을 먹어대는지

먼 산에서 조달되는 통나무만으로는 두 끼밖에 못 먹은 양 배가 고프기에

때로는 남의 산인 앞· 뒷산에서 몇 그루 슬쩍 해 오기도 했다.


최대한 소리를 줄여 베어 내고는 남은 그루터기를 흙과 낙엽으로 덮는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는 나무가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통나무에서 잘라낸 솔가지까지 몽땅 가져와 아예 흔적을 없앤다.

이렇게 하기까지엔 누가 볼까봐 잠시도 머뭇거릴 틈도 없이

잽싸게 해 치워야 한다.

아무리 지게 짐이 무거워도 쉬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오면 겨울인데도

식은땀이 밴 옷이 차가와 으슬하다.


하지만 사실 시골 인심이란 그 나무를 베는 걸 현장 적발했더라도

혼내주는 山 주인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행위 자체가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기에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허둥대기 마련.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그랬기에 그냥 그래야 하는가보다 하고

따라 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커 왔다.

- 작은 도둑질 한 번 하더라도 최소한 제 발 저리는 양심을 지녔었다.


아궁이!


이 아궁이는 옛 시골 집 삶의 기초였다.

밥을 지어도 방을 덥혀도 이빨 없는 이 아궁이가 나무를 먹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슬슬 자취를 감추던 아궁이!


그런데 최근 경제 침체기를 맞아 시골 양옥집 기름 값이 모자라

겨우내 꽁꽁 언 채 비워두고

별채에 아궁이를 만들어 옛날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아궁이가 옛 유물로 사라져야 추억다운 추억이 될 텐데

그 아궁이가 다시 등장한다니 외려 안타깝기만 하다.


하루 빨리 우리 경제가 회생되어서

이 시골 아궁이가 추억 속 유물로 저 멀리 잊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내가 지은 흙집 아궁이가 반사적으로

희귀해지기도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