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김영호
나는 매 맞는 팔자였는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학교 시설을 둘러보고 있는데
당시 밴드부장 눈의 띄여 밴드부에 뽑혔는데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1주일 평균 5대의 ‘빠따’를 맞으면서도 1학년 때는 감히 밴드부에서 벗어날 엄두를
못 냈었습니다. 한꺼번에 50대를 맞아야 한다는 끔찍한 밴드부 자체 내규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2학년 때 용기를 내어 50대를 맞고 탈퇴하겠다고
선언, 결국 50대를 맞던 중 기절했었는데 깨고 나니 5대가
모자라기 때문에 탈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밴드부장(3학년)에게 복수하기로 결심!
잭나이프를 품고 어두워지는 늦가을 저녁, 하교하는
밴드부장을 미행하게 되었습니다. 완행버스에서 내려 산속 비탈 오솔길까지 따라가다 보니
복수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는데도 시행할까말까 망설이다 결국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까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밴드부장은 병든(콜록콜록)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측은한 그 모습을 보고 복수 결심은 흔들렸고, 그에게 겨우 왜 나를 탈퇴시키지 않느냐고 따졌을 뿐이었으며 그로부터 오히려 도와 달라는 부탁만 받게 되었습니다.
밴드부장에게는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는데
그 장학금을 못 받으면 결국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으며, 동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밴드부를 더욱 활성화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이미 숙련된 자가 빠지면 도저히 연주가 불능하니 후임자가 능숙하게 될 때까지 만이라도
탈퇴하지 말고 도와 달라는......
바보같이(?) 저는 그의 부탁대로 탈퇴를 보류...
아니 졸업할 때까지도 그놈의 밴드부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복수의 일념을 참지 못하고 참극을 벌였다면 범죄자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처지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범죄자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군 간부로 자진 입대해서 특과병과 교육을 받게 되어 4주째 첫 외박을 나갔다가 강원도 촌놈이 서울의 저녁엔 교통지옥이 된다는 것을 실감할 기회가 없다보니
서오릉 전문학교 귀대 시간(18:00)을 못 지키고 딱 5분 늦었습니다.
또 한 동료도 5분 늦었는데 이름이 나빠서인지 그 놈도 제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명은 그 악명 높았던 구대장으로부터 빠따 20대를 맞고 반성문도 20장씩이나 썼습니다. 그 정도야 밴드부 출신에다 국어과를 쬐끔 다닌 놈이니 거뜬히 해 냈고
그것으로 대가를 마무리 한 줄 알았는데.... 우리 두 명을 제외한 96명으로 하여금 1대씩 96대의
돌림 빠따를 때리게 할 줄이야....

결심했습니다. 서오릉 전문학교 법당 경계근무 심야시간을 이용하여 앵봉 쪽 울타리를 뚫기로
결심했습니다. 아! 내가 탈영할 줄이야! 그러나 이런 수모를 당하고 이 부대에
더 있을 바에는 죽더라도 우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다 나 하나 탈영으로 전통과 명예가
있는 부대에서도 탈영자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학교 교육체제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나름대로의 당위성과 함께 한 발짝 옮기는 순간!
졸고 있는 줄만 알았던 동료가 말없이 담배를....

경계 근무 시에는 휴대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받아 함께 피우며
결국 동기가 당할 고통, 그리고 제 남은 인생이 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탈영 결행을 참았습니다. ( 그 동기는 내가 뭘 하려고 했었는지 알고나 담배를 권했는지? 나는 아직도 그 담배를 못 잊어 끊지 않는데 그 후 그 동기에게
그 담배를 내밀었더니.. 금연했다고 하데요)
그 당시 참지 못했다면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이렇게 매 맞는 팔자였기에 임관 후 그 옛날 구타가 성행하던 시절부터
퇴역할 때까지도 방위병까지 포함하여 하급자들에게 단 한 번도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맞아 보았기에.....
고 2때부터 8년간이나 교제한 애인을 버리고
만난 지 3일 만에 부모님 강요로 약혼한 현 아내의 성실한 삶에 힘입어
결혼한 지 4년 만에 의정부 가능 3동에 109㎡(33평형) 규모의 단독주택을 매입해 거주하던 중
전역 전 직업을 갖겠다면서 동 주택을 담보로 투자했다가 전액 사기를 당한데 이어 모친 사망, 차녀의 화상, 아내의 신장병 입원, 허위 진정에 의한 감찰부 뒷조사에 따른
준사관 응신 포기, 등등.... 몇 년간 연이어지는 불행 앞에서 이제는 세상을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과음으로 죽었다는 뉴스도 더러 있지만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죽겠다고 대병 한 병을 원샷 해도 오히려 머리는 맑아지며, 두 딸의 울부짖는 장면들만 아른거렸을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군 부대에서 통제하고 있지만 당시 경기 고양시 오봉산 입구 ‘너른 바위’(넓은 바위인데 그렇게 부르는 듯) 계곡에서
만취한 채 높은 바위에서 다이빙하기 직전, 마인드 콘트롤로써 결국 참아냈습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역경에서 참았기에 그 후에 진급되고 아파트
당첨되고, 딸들 잘 자라났고... 이제 다시 고향에 집 짓어 몇 년째 살고 있고...
이어지는 행운으로 다소의 불운도 겪어내
이제 정년 전역하여 잘 살고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령부 예하 부대에서 안정계장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 선배들 중 개선안도 제출하지 않고 아예 정기적 업무도 안 하고 버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업무는 안하면서 훈련하는 피 지원부대 잔디 연병장에서 골프연습이나 하는
분이 있었는데 지휘관에게는 향기 나는 외제 담배나 상납하면서 비위를 맞추더니
제가 수집관에게 할당되는 예산을 착복했다(사실은 단결활동비를 그의 하급자를 통해 전달했는데
그 하급자가 안정계 회식에나 보태라고 얼마 내놓았었는데)고 고자질하여 소란을 피운 바 있었습니다.
전역지원서를 작성하고 전역 후의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여의치 못해
결국 아내의 참으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전역지원서 제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참아냈기에 그 후 저는 업무로 인정받고 그 선배는 부대 구조조정 때 강원도 최 전방으로 쫓겨 갔다가 자진 전역을 했습니다.
또 한 분은 하도 업무를 엉터리로 하여 저로부터 비교적 지적을 많이 받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부대 회식이 끝날 무렵 저를 부르더니 평소 선배를 우습게 여긴다면서
엎드려뻗쳐를 요구했습니다.
군대만 빨리 들어왔을 뿐, 나이도 어린놈이 감히... 어이가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 저는 그분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달려온 주변의 후배들로부터 제지를 당해 타의에 의해 결국 참아냈습니다.
당시 참아내지 못했다면 하극상 죄로 법정에 섰을 것입니다.
군대에서의 하극상(상급자에게 반항하는 행위) 행위는 전시에는 사형까지 받을 정도의
큰 죄로서 평시엔 처벌이 불가피하고 그 처벌 경력은 진급 심사에서
결정적 감점을 받아 결국 조기 전역 결과가 초래됨을 감안하면
정말 그때 잘 참았던 것입니다.
끝으로 어느 연대 병기관(준위 000)이 부대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을 인용,
소개해 드리며 맺겠습니다.
주어진 생활 여건에 따라 수없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괴로워하지는 말자.
내가 가는 길은
주말만 되면 정체가 되는 고속도로가 있고, 신호등이 수없이 많은 국도와 지방도로가 있는가 하면, 덜크덕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도 있으며, 걸어서만 가야 하는 오솔길도 있듯이,
어느 것 하나 만만한(쉬운) 것이 없지만 각 도로마다 장단점은 다 있으며 멋도 있지 않느냐!
신은 사람의 내면을 보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을 보기에
임무 완수를 위해 하는 업무라도 어떤 날은 하급자로서 가슴속 깊이 비애를 느끼기도 하지만 ........ 실망하지 말자.........스트레스도 받지 말자.................
비록 오늘 무시당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더라도 업무의 맥과 급소를 시기적절하게 짚어주면서도 군대 생활(업무)에만 "올인" 하는 탓으로 한편으로는 냉정하게(찬바람) 느껴지기도 하지만 냉정함 보다는 인정(다정 다감 함)이 "2%" 더 많은 지휘관님이 계시기에
군 생활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선택한 이 도로 위에서 오늘도 우리 모두는 각자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목적지)를 향해 활기찬 마음과 힘찬 자세로 달려보자..
부우웅~~~~~~~ 룰루~~랄라~~랄라~~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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