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래올 전원일기(1) 전원생활 첫걸음 한 달

락운강촌 2009. 5. 18. 08:43

 

 

 

 

 

락운의 가래올 전원일기 (1)

 

가래올 락운


o 전원생활 첫걸음 한 달


  사회 적응교육을 받자마자 고향 산골에 마련해 놓은 귀틀집으로 이사를 왔다.

여기는 30여 세대가 거주하는데 절반이 토착민이고 절반이 외지 전입주민이란다.


이미 1년 전 집들이(아내만 전입) 행사 때부터 토착 주민들은 나를 고향으로

돌아온 자로 반기고, 외지 전입주민들은 도회지에서 살다가 전원생활을 위해 찾아온

동료로 간주해 주고 있다.

숨어 있는 양측의 알력 사이에서 나의 눈치 보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직은 그저 스스로 위축됨을 느끼지만...)

하지만 준공 후 1년간이나 방치하다시피 한 귀틀집 환경정리에다

비탈 텃밭 500여 평에 씨앗뿌리기에 바쁘다보니

아직 지역 어른들과 고향에 남아 있던 친구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30여 년 전 고향 떠나기 직전에 농사 1년을 경험해 보았지만 그땐 소 몰고 밭갈이하는 이른바 소짝

시대였다.

機械化農業으로 바뀐 여건에서 우선 밭갈이

작업부터 남의 신세를 져야 했다.

학교 후배에게 부탁했더니 시간이 없다면서 식전(食前)인 새벽에 겨우 시간을 내어 경운기를 몰고 와서 밭을 갈아 주고는 식사도 않고 가려 하기에

수고비를 건네니 한사코 사양한다.

시골 인심이 야박해졌다지만 선배에게 품값을 받기가 좀 거북했나보다.


다음 날 아내가 고맙다면서 찾아가 고기 몇 근과 작은 술 한 병을 건넸지만,

오히려 ‘땅두릅’과 ‘버섯’ 등 받아온 보따리가 더 컸다.

(몇 달 전 ‘야박해진 시골 인심’ 제하로 기고한 글에 대해 비평해 준 어느 카페 회원의 충고가 떠올라

내심 흐뭇했다.)


하지만 면사무소에 전입 신고시 담당 공무원에게는 실망했다.

도회지처럼 으레 돋보기가 있겠거니 하고 가져가지 않았는데 돋보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겨우 실눈을 뜨고 신고 용지 양식에 맞추어 적어 냈었지만

마치 옛 상관처럼 줄을 박박 그으면서 다시 작성해 오란다.

어느 부분이 어떻게 틀렸으니 어떻게 고쳐야 한다는 자상함도 없기에

뭐가 잘못 됐냐고 물으니 당신은 전 전입자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세대주가 아니란다.

내가 잘못 작성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

뭔가 친절한 공무원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대해 취중 환담을 나누던 ‘오 박사’라 불리는 분이 나보다 더 화를 내면서

면장이 당신 선배이니 당장 얘기하라면서 전화를 곧바로 걸어주려 했다.

오히려 내가 만류하고 말았지만 “사회로 돌아가면 무조건 앞에 나서지 말고

고개 숙이라”는 교육 내용을 잠시 잊었던 나를 스스로 꾸짖게 된 계기였다.


밭갈이를 했으니 비닐 포장 작업이 이어졌다.

아내와 둘이서 호미로 꼼꼼하게 비닐을 덮느라고 규모 적은 밭인데도 하루 종일 힘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옆집의 비닐 포장 작업을 지켜보니 꼼꼼할 필요도 없이 호미가 아닌 삽으로 대충 덮고 있었다.

그리고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이 있기에 무슨 비닐이냐고 물어보니 참깨용 비닐이란다.

아내는 당장 그 비닐을 사오더니 기존 덮은 참깨 심을 공간에 덮은 비닐을 벗겨내고

구멍 숭숭 뚫린 비닐로 교체하자고 한다.

그 어렵게 덮은 비닐을 걷어내자니 헛수고에 짜증이 났다.

결국 우리는 옆집 아저씨가 만들어 준 깡통 반 쪼가리로 일일이 비닐 위에 구멍을 뚫고

참깨 씨를 뿌렸다.


모르는 길은 물어 가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아직은 낯선 곳에서 내 지레짐작대로만 처리하다 몸만 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