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황홀한 소꿉놀이

소꿉놀이 (전편 2. 이별)

락운강촌 2014. 4. 17. 09:44

소꿉놀이

(전편)

 

락운강촌                                     

 

2. 소꿉 각시와의 이별


어렴풋이 덕순에게서 젖비린내 같은 걸 느끼면서 점점 몽롱해져 갔고...

얼마나 지났는지 하도 오줌이 마려워 깨고 보니

아, 여기가 어딘가?


방공호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덕순이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가버리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다음에 물어보니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화가 나 집으로 가버렸단다.

그래도 그렇지. 나쁜 지집애. 산 속에 나 혼자만 내버려두고 가다니... ?)


너무 미웠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어두운 산 속에 나 혼자만 있음을 느끼곤 

난 너무나 무서웠다.

어디선가 뱀이 개구리 잡아먹는 소리도 

나는 것 같고

옛날 얘기에서처럼 호랑이가 흙을 끼얹는 것 같은 무서움도 엄습해 왔다.

어렴풋한 길을 막 뛰어 가자니 뒤에서 뭔가가 

뒷덜미를 잡는 것도 같고...

그래서 멈춰 서면 감히 뒤돌아 볼 용기마저 

멈칫 했다.


어머이 얘기로는 산기슭에 전염병으로 두 살적 

죽은 나의 둘째 형을 묻었는데

그 다음 날 밤 여우가 그 형의 팔을 물고 가다 

술 취한 아부지의 고함 소리에

물고 있던 팔을 놓고 도망갔었다고 했었다.

혹시 그 여우나 늑대가 날 덮치지 않을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겨우 집에까지 다 와서는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 발 걸음이 아무리 소리를 안 내려고 해도

가슴의 콩닥대는 소리가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막상 집에는 아부지 어머이는 없고 세 살짜리 여동생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한참 후 동네 여기 저기 헤매며 나를 찾다가 못 찾아 당황하며 돌아온

아부지 어머이는 나를 보자마자 어디 갔었냐고 다그치면서

똑바로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반은 사실대로 반은 거짓말.

" 사실은 부뚜막에 있는 어머이 술을 맛보다 하도 달아서 조금 조금씩

 먹다보니 다 마셨는데 좀 있다가 땅이 막 솟아나고 점점 어지러워

 뒤란 바위 위에 쓰러져 있다가 이제야 깨어나서......"


어버지는 말끝을 흐리는 나대신 어머이를 마구 야단쳤다.

" 그것도 술인데 애들 손닿는 곳에 놔두면 어떻게? 애 잡으려고 그래?

  아부지의 큰 소리에 어머이는 결코 기죽지 않고 대들었다.

" 저 녀석이 그걸 먹을 줄 짐작이나 했겠수?  지 애비 닮아서 벌써부터

  술이나 퍼마신 걸 아 나더러 어쩌라는 거유?"


두 분이 싸우는 사이 나는 살금살금 빠져 나와 잠든 척 했다.

(여느 때 같으면 깨워서라도 저녁밥은 주었을 텐데 어머이는 화가 나서 깨우는 시늉만 하다가

 밥도 안 주고 안방으로 되돌아 가셨다.)


점점 배가 고파 왔지만 저녁 내내 잠을 잤기에 잠은 안 오고 낮에 덕순이와의

소꿉놀이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 아버지 땜에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혼례식인지 결혼식인지를 내가

  했다니.... 신랑각시는 껴안고 자는 거라며 덕순이가 나를 끌어안았고..

  그런데 내 잠지를 왜 꼭 쥐고 잤을까? 

  그때 기분이 묘해졌었는데 아마 단술을 마셔 몽롱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덕순이가 내 각시라고 생각하니 옆에 있었으면 다시 안아주고 싶은

  목마름이 간절해지고 오줌이 마려운 듯한 짜릿한 느낌이 아랫배에 스물거렸다.


정말 오줌이 마려운가 하고 밖에 나가니 오줌은커녕 잠지만 더 커져 보였다.

고개를 돌려 덕순이와 혼례식을 치르던 방공호 쪽을 바라보니

컴컴한 산 능선 위로 묜묜한 달빛이 흐르는데 밤 부엉이가 짝을 찾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거기를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덕순이가 오기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러다 지쳐 나도 모르게 덕순이네 집을 기웃거리는데...


덕순이가 봉당에 나와 앉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아기를 업은 채 얼른 달려와

주변을 살피면서

" 야! 여기 있으면 클나니까(큰일 나니까) 빨리 먼저 가 있어." 하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좀 있다가 아기를 방에 재우고 방공호에 다려온 덕순이는 조금은 쩔뚝대고 있었다.

그 날 엄마한테 부지깽이(아궁이에 불 땔 때 잘 타라고 쑤셔대는 막대기)로 엄청나게

맞았다고 했다.


" 우리가 신랑각시 놀이 한 걸 엄마가 어떻게 아셨대?"

" 그게 아니고 아기 포대기를 잃어버렸다고....."

" 저 포대기?  여기 있다고 하면 되지 왜 맞아?"

" 얘도 참, 여기를 어른들한테 들키면 너까지 혼 나! 

  넌 참 그렇게도 아둔하냐?"


덕순이로부터 아둔하다는 핀잔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 날 그 포대기를 다시 덮고는 

정말 어린 부부다운 황홀한 속삭임에

밖에 누가 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 야, 우리 저번에 얘기하다 그냥 잠이 들어버렸었잖아."

" ?........"

" 요새 며칠 밤 자는 척하면서 엄마 아빠 밤중에 하는 거 자세히 봤거든."

" 자면서도 뭐 딴 것도 해?”

" 너 그런 거 한 번도 못 봤지?"

  아부지 어머이가 한참 자다가 우리 애들이 다 잠들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아부지가 어머이한테 넘어와서 어머이 젖을 꺼내 먹더라."

" 아기가 먹던 걸 아부지도 먹어?"

" 응. 그러면서 어머이 옷을 마구 벗겼어."

" 어머이는 그러는데도 가만있어?"

" 아니,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아이들 깨지 않게

  조심해라고 말했어."

" 그러고는"


나는 덕순이 얘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침이 말라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왠지 덕순이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돌아눕고 말았다.


당시 우리들 언어 세계에서는 고상하게 영어 단어를 쓸 줄은 당연히

몰랐고... 또 대체 상징어를 사용할 줄도 더더욱 몰랐다.

그저 무지한 농사꾼들의 언어를 들은 그대로 원색적인 '자× 보×' 그대로였다.


그런 단어를 되풀이하다 덕순이도 입술이 말라 혀끝으로 침을 묻혀 가면서

마치 땅 위에 꼬챙이로 그림 그리듯이 아부지 어머이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 야, 이리 바짝 와 봐!"

" ..........?"

" 빨리!!"


나는 어차피 덕순이 품으로 안겨야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 우리도 너네 아부지 어머이처럼 그렇게 해야 되는 거야?"

  마지막 미지에의 두려움을 일단 거부해 보았다.


난 왜 끝까지 반항하지 못한 채 덕순이가 하라는 대로 다 해야만 하는 걸까?

지난번처럼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덕순이 말에 취해 우리는 결국

아랫도리마저 벗어버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꼭 껴안고

막상 나를 포기하자 마치 꿈속에서 언덕을 뛰어내릴 때처럼 짜릿하고 황홀했다.


그런데 갑자기 굴 입구에서

"야! 이놈들, 너희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호통소리에 놀라 동시에 내다보니 덕순네가 세 살고 있는 주인집 할아버지였다.

아마 땔감을 마련하러 산기슭에 왔다가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나절 내내 우리 두 집은 난리가 났다.

우리 그 소꿉 살림살이들은 박살이 났고

두 아부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방공호를 메웠으며....

그리고 덕순이가 가져온 포대기와 내가 훔쳐온 작은 주전자는

각각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아부지로부터 절대 덕순이 한테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이른바 금족령을 받았고,

아마 덕순이는 또 어머이의 부지깽이로 엄청나게 맞아 종아리에 피가 났을

것이었다. 


그 후 한참 동안... 아니 초등학교 입학하기까지 나는 덕순네 집을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각시가 보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덧 계절이 한 바퀴 돌아 근 일 년이 지나서

우리는 예정대로 초등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덕순이는 정말 엄청나게 예뻐져 있었다.

마치 천사 같았다.

소꿉놀이 때 그  꾀죄죄한 그런 누더기 옷이 아니라 깨끗한 주름치마에 스웨터.

그리고 매끄럽게 빗은 단발머리는 눈이 큰 덕순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이는 커가면서 변한다고 했지만 너무도 ‘완변(完變)’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남자 또래 틈에, 덕순이는 여자애들 틈에 끼어 다녔기에

감히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다만, 우리는 가끔 눈이 마주쳤고, 그럴 적마다 얼른 외면해야 했다.


당시에는 남녀 어린이가 눈빛이라도 오가다 또래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얼레리 꼴레리 놀림감이 되곤 했기에 서로가 본능적으로 조심하고 있었기에...


나는 학교에 오갈적마다 덕순이네 집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혹시 덕순이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덕순이가 나오면 얼른 걸음을 빨리해 저만치 앞서 갔다.

(그래서 훗날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 현제명 작곡 ‘그 집 앞’ 노래를 제일

좋아하기도 했었다)


한때는 아랫도리까지 맞대었던(결코 어른들 처럼의 요철<凹凸>이 맞물렸던 건 아니지만)

사이였는데도 엄연히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리움 덩어리 그런 존재였다.


그렇지만 또래 친구들 틈에서 큰소리로 지껄이면서도

여자애들 틈에서 확연히 돋보이는 덕순이에게만 남몰래 눈길을 고정시키면서

'덕순이는 분명 내 각시'임을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순네는 강원도 양구인가 화천인가 민통선 너머에 농지를 마련해

이사를 가 버리고 말았다.(그저 먼발치에서 남몰래 지켜보면서 불가항력의 이별에

가슴 속이 마치 급체인 듯 아파왔었다.)


안 보이면 멀어지고 긴 세월이 흐르면 망각되는 남녀 관계.

더구나 철모르던 소꿉시절의 그런 숨기고 싶은 관계는

정말 기억 한 귀퉁이 속에서도 저 먼 구석...

아예 꺼질락 말락 할 정도로 점점 잊어져 가고 있었다.


더구나 초등교, 중학교, 고등하교, 대학교까지도 다 마치고...

이미 각자의 다른 인생을 살아가면서 특히 각자 사랑의 배필을 만나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었는데....


인연이란 참 모질기기도 하여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데 이어

간호사관학교를 마치고 군 야전병원 간호부장이 된 덕순이와

그 병원에 정보 수사기관의 보안관으로 파견된 나는

또 한 번 마주쳐 지독한 사랑을 앓게 되고 말았으니....


또다시 헤어질 바에는 만나게 해 주지나 마시지 하나님,

아니 '영철'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조물주께서는 우리를 왜 또 만나게 하고

안타까운 가슴만 응어리지게 한 채 결국 갈라놓으셨는지?

 

그래도 차라리 철없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 나 혼자 그 방공굴을 바라보니

방공호는커녕 그 산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몇 년 전 넓은 논을 메워 밭을 만들기 위해 그 산이 허물어졌단다.)


그래, 어차피 이룰 수 없음이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방공굴이 있던

산 자체가 없어진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산을 허물게 하셨으리라


하지만, 내 집 뒷산기슭 메워진 옛 다른 방공호라도 복원하고 싶은

이 마음은 또 뭘까?

이 나이에 그 무슨 소꿉각시를 그리는..... ?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 방공호를 복원해서 자연 냉장고로 쓰려는 것 뿐이다.

(정말 아니다!)


후편에 이어집니다.

 

첨부파일 진달레꽃.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