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래올 전원일기 29】큰 노적가리 가리산 등반

락운강촌 2009. 9. 18. 21:11

 

 

 

락운의 가래올 전원일기 (29)


가래올 락운

♡ 큰 노적가리 '가리산' 등반


 경치 좋다는 가을 쯤 가리산에 가보고 싶었는데 '허림의 홍천 답사기'를 읽고

좀 더 빨리 가보고 싶어 계획을 수정, 9월 중순인 엊그제 아내와 함께 출발했다.

 

등산로 안내문에는 1㏊의 숲은 30∼70톤의 먼지를 정화할

수 있고 이런 능력의 인공 정화장치를 설치하려면

100∼200억 원이 소요되니 숲의 신선한 공기 유지를 위해

흡연을 하지 말란다.

마치 흡연자들을 공기 오염의 주범으로 몰아치는 것 같아

흡연자로서 내심 억울했지만 이미 등산객 에티켓 차원에서

담배를 휴대하지는 않았었다.

 

 

 

 초입부터 야생화 투구꽃이 내 카메라를 유인했다.

 꽃모양이 투구 쓴 병사 같아 이름이 붙여진 투구꽃은

 잎과 뿌리에 함유된 강력한 독성분 때문에 옛날 임금님이

 내리는 사약의 원료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방에서는 양기를 돋우는 데 쓴다고 하니 

 독은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자연의 순리를 재삼 깨닫게 한다.


'합수머리'에 도달해서 길이 가파르고 험한 ‘무쇠말재’로

오르자는 아내를 설득하여  비교적 완만하다는

‘가삽고개’로 올랐다.(사실은 설득이 아니라 사정했다. 등산에 자신 없는 나를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힘 덜 드는 길로 가자고...)


참나무 숲에서는 뚝!뚝..! 마치 누군가 돌팔매질을 해 대는 것처럼 도토리들이 떨어지고

다람쥐들이 열심히 물어다 어딘가에 감추고 있었다.

제깐엔 겨울나기용 먹이이겠지만 어디다 감추었는지 찾지 못해 도토리들은 싹이 나서 

무럭 무럭 자라 참나무 숲은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다람쥐한테는 먹이를 뺏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굵고 반들반들한 도토리를 주워

배낭속에 넣었다. 이미 올 겨울용 도토리는 다 마련해 놓았으니 더 줍지 말자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이 자꾸 자꾸 가고 있었다. -이것이 견물생심?-


도토리는 도토리 묵도 맛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밀 통밀가루에 도토리 가루를 1/3정도

섞어서 칼국수를 만들어 먹으면 그 구수한 맛이야말로 우리의 토속 별미 중 별미다.

전라북도 지역 도토리 칼국수가 유명하다지만 아마 수입 밀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아내가 만든 순수 국산 도토리국수 맛엔 못 미칠 것이리라.

 

옛 화전밭 흔적(산골짝 정상까지 계단형으로 조성)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이 험준한 산 정상에까지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원동리 고개(홍천고개로 불린다)까지 도달했다.


정상은 왼쪽으로 아직도 900m나 남았다.

가삽고개까지 300m,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참배나뭇골’로

가는 큰 고개다.


물로리는 중국 '漢 天子(한 천자)' 전설이 깃든 곳이란다.

소양호변에 자리한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는 한때 매우 번성했던 마을로 수몰되기 전에는

400호의 면소재지였으며, 이 마을에 살던 한(漢)씨 집에 하룻밤 묵은 스님 두 명이

머슴에게 계란을 달라고 했고, 스님들은 명당에 계란을 파묻고 축시(丑時)에 부화되어 닭이

우는지? 즉, 천자가 날 자리인지를 확인했지만 이미 머슴이 삶은 계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부화될 리가 없었단다.


두 스님이 속삭이는 대화를 엿듣고 스님들을 미행한 머슴은 스님이 명당이라며 계란을

파묻은 지금의 한천자 묘(물로리 양지말에서 가리산 정상 쪽으로 10분쯤 올라간 곳)

알게 되어 그곳에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묻었는데 금관에다 소 100마리를 써야

한다고 했지만 머슴 처지로서는 아예 어림없었고, 다만 금관 대신 노란 귀리 짚으로

시신을 싸서 묻었고, 몸이 가려워 이 100여 마리를 잡았는데

결국 이 이 100여 마리가 소를 대신했는지 훗날 이 머슴의 아들이 중국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을 보면, 이 머슴이 천지개벽의 물난리를 피해 북으로 북으로 가다가 결국

중국까지 갔는데 때마침 중국에서는 후대 없이 천자가 죽어 짚으로 된 북을 쳐서

북소리가 나는 새 천자를 구하는 중이었으며,

머슴의 아들이 북소리를 내게 되면서 드디어 천자로 등극 하였단다.


이후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 그 묘를 찾으려 했지만 그 사신이 그 묘를 찾게 되면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 될 것을 우려해서 천자에게 "조선에는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거짓말을 해서 결국 천자는 할아버지 묘를 못 찾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사신 한 놈의 거짓말로 우리는 중국 땅을 잃었다. 요즘 만주 땅 되찾기 운동이 한창인데

만주 땅이라도 되찾아야 하겠다.)


하지만 지금도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게 해 달라면서 열심히 벌초를 하고 있어

천자묘는 잘 관리되고 있다고 하며, 비린 음식 먹고 그곳에 가면 화를 당한다고 하여.....

 

우리는 아침에 고등어를 먹었기에 아예 그쪽 방향은 바라보지도

않고 원동리 고개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고사된 참나무 고목에

괴상한 혹이 붙어 있어 한참을 구경했다. 

 

암 치료를 겪은 아내는 나무도 암을 앓아 죽은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지만 나는  이 좋은 공기와 가리산 정기를

먹고 사는 생물이 암에 걸릴 리는 없다고 반박해 봤다.


다시 정상 방향으로 텅 빈 속이 노출된 참나무 고목을 비롯한 오래된 참나무들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정상을 향하니 먼저 3봉 중 2,3봉이 먼저 반겨 주었지만 가리산 3개

봉우리들은 그리 호락호락 발을 내딛게 하지는 않았다.

 

 

 

 

쇠막대 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험준로에다 톡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큰 바위덩어리까지 우리에게 상당한 공포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데 2봉의 이 소나무는 아들 욕심 많았던

우리 조상님들 닮았는지 잔가지가 엄청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 카메라에 많이 찍혔을 것이다.

  

 그러나 2봉에서 1봉으로 건너오는 험로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신의 뿌리로 계단 역할을 제공하여 등산객들을 안전하게

이동하게 하고 있었고,

 

1봉으로 오르다 뒤를 보니 2봉의 바위 절경이 꼭 설악산이나

북한산을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웅장하고 멋있었다.

 

 

 

 드디어 정상!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와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를 경계로

 하는 가리산의 정상 1,051m

 

 우리는 이 정상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넓은 하늘과 동서남북 탁 트인 곳에서 좀 오래 머물다

 하산하려 했지만

 다람쥐가 주위에서 시위를 벌인데 이어

 특히 날개미들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오죽 급했으면 아내는 다른 등산객이 보든 말든

 웃옷을 벗어 제치고 가슴 속을 파고 든

 날개미를 떼어냈다.


 멀리 백우산, 백암산, 쇠뿔산, 가마봉, 응봉산, 점봉산,

 운문산, 공작산, 오음산, 태기산, 연엽산, 대룡산 등

 내로다 하는 산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는데

 일일이 확인한 틈도 없이 우리는 쫓기다시피 가파른

바위로 된 내리막길 ‘무쇠말재’로 향했다.  

 

내려오다 아들 낳게 해 달라고 빈다는 석간수에도 들렸다.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나와 가랑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샘물.

 

사람들의 심리가 참 얄궂다.

꼭 물 나오는 구멍에 다른 관(管) 대신 가랑잎을 끼워 여성의 밀샘을 연상케

하여야 했을까?


그래서인지 샘물 맛은 시원하기 보다는 좀 짭짤한 것도 같았다.


무쇠말재!

옛날 이 일대가 큰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었을 때 무쇠로 배터를 만들어 배를 매어

놓았다 하여 무쇠말재라 하고,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송 씨네 누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어느덧 오빠도 나이를 먹고 동생도 나이를 먹게 되자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배필을 얻으려고 해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야, 이제 너와 나는 배필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도 없고 대가 끊길 것 같으니 씨라도

퍼뜨려야 한다. 맷돌을 하나씩 가지고 고리봉으로 올라가 굴려서 이것이 맞아 엎어지면

우리 둘이 사는 거고, 각자 가면 우리는 못 산다’


하늘의 운에 맡기기로 하고 오누이가 맷돌을 굴리니 이 맷돌이 산비탈 아래로

막 굴러갔는데 오누이가 내려와서 보니 맷돌이 딱 맞아 엎어져 있었다.

‘할 수 없구나. 너하고 나하고 살자’

그리하여 이들 오누이는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온단다.

(아마 우리나라 근친혼의 시효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이 무쇠말재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무쇠로 만든 말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엿장수가

지 맘대로 가져갔다고 한다.(정말 엿장수 맘대로다.)

 

 

하산하다 보니 참나무 고목 양 갈래

사이에 커다란 바위가  끼워져 있었다.

일부 등산객들은 참나무가 먹성이

좋아서 돌덩이까지  집어 삼키고

있다고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나무도서는 고통이어서

이렇게 만든 인간에 대해 저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빼 주고 싶었지만 이미 체념한

그 나무는 자기 몸의  일부인 양

운명처럼 받아들여 단단히 아물리고

있어  그냥 놔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포기하고 말았다.


 이 뿐이 아니고 등산객들 편의를 위해

설치한 밧줄은 나무들을 옥조이고 있어

이것이 자연보호인가 하는 회의(懷疑)감을 들게 했다.

(관계 당국에서는 별도의 지주대를 설치하여 나무에 설치한 밧줄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은 ‘가리산을 오르고 꼭 용소폭포에서 귀를 씻고 가야 가리산의 

정기가 몸속에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어 ‘용소폭포’, 즉 가리산 폭포를 찾았으나 

이정표가 없어 어디인지 몰라 그냥 지나쳐 왔고,

 

정상에서 소양강의 모습이 보인다 하여 찾아보았으나, 밑에 낀 운무 때문인지

보이지 않았다.(지리에 어두운 내가 못 본 것인지도....)


이런 저런 핑계로 가을 단풍이 무르익을 때 쯤 다시 한 번 가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