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내가 처음 이 단어를 들었던 게 아마 고1 때? 디자인 수업 받으면서 그라데이션에 대한 개념을 배웠는데 색이 다른 색으로 이동하는 경계 부분을 부드럽게 처리하여 색이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는 듯 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까시 효과라고 불렀었다. 일본어 ぼかし를 읽은 것으로 일본식 표현이 한국의 인쇄,디자인관련 업계에 그대로 자리잡은 것이다.
인쇄나 사진, 디자인 분야에서는 예전부터 일본어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일제 시대의 잔재라기보다는 인쇄, 디자인 등의 분야가 일본 자료와 서적을 참조하면서 일본 책에 실린 내용이나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읽어버리고 받아들여버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책 표지는 도비라라고 하는데 이는 여닫이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 도비라(どびら/扉)에서 따온 것이다. 책 표지는 여닫이 문과 닮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책 표지, 또는 책 안 내용 중 일부가 시작되는 페이지 등을 도비라라고 부르는데 일본 출판서적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이 단어를 여닫이 문, 또는 문짝 등으로 우리말 옮김하지 않고 그대로 도비라라고 불러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 말 놔두고 일본 말을 쓰다니 불쾌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그 뜻을 알고 난 다음엔 기분이 좀 안 좋았다. 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책 만드는 작업 중에 '여닫이 문 작업했어요?", "문 좀 봐주세요." 이러는 것보단 "도비라 작업했어요?", "도비라 좀 봐주세요." 이러는 쪽이 구분이 더 쉽다. 물론 익숙해지면야 '문'이 실제 사무실 문이 아니라 책의 쪽을 일컫음을 금새 눈치챌 수 있는 일이지만 일본식 표현에 대해 딱히 경계심이 없었던 시기인데다가 일본 책을 그대로 옮겨 찍는 만행도 서슴치 않던 상황이었으니 도비라니 하리꼬미같은 표현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려는 선량한 작업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 당시의 악습 아닌 악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어도비 인디자인으로 책을 디자인하는 요즈음에도 책 표지는 도비라며 책 등은 세나카라고 불리운다.
보까시가 사용되는 용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채색 방법이다. 두 개의 색이 칠해질 때 그 경계를 부드럽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중간색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경계면에 보라색을 떡하니 올려놓으면 중간색이 들어간 은은한 변화가 아니라 삼색기 패턴이 되어 버린다. 이때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색 변화가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보까시이다. 어렵게 말할 거 없이 그냥 그라데이션이다.
A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경계가 은은하게 흘러가는 이상적인 그라데이션 샘플이다. 이러한 색 흐름을 위해서 에어브러시가 필수였다. 프라모델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웬지 모형 입문서가 연상될 설명이네요.
B는 에어브러시가 아니라 붓칠 등의 손 작업으로 색 흐름을 만들어낸 경우를 가상한 샘플이다. 포스터컬러 색 조합하면서 이런 거 과제로 밤새본 사람 꽤 될거다. 흑흑 끔찍한 시절... 포스터컬러를 사용하는 경우 이러한 그라데이션은 단계를 두고 두 색을 조합하는 비율로 색 흐름의 단계를 맞추는, 다소 수학적인 방법을 기본으로 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색 단계가 10단계이면 빨강 대 파랑을 10:0, 9:1, 8:2... 2:8, 1:9, 0:10으로 10개의 색을 만들어 색 단계가 올려질 10개의 구역에 살살 칠하는 거다.
두번째는 인쇄기법의 기술적 표현을 일컫는 경우이다.
C는 A나 B과 같은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작업물을 인쇄할 경우 인쇄된 표면의 망점을 시뮬레이션한 샘플이다. 실제 인쇄 상태를 포토샵으로 표현하는 게 그리 만만치 않아서 보기 좀 어색한데... 인쇄는 망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상당히 달라진다. 전문적인 설명은 못 하겠다. 내가 인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인쇄과정에서의 망점 조절을 통해 인쇄결과물의 색이나 명암 변화를 은은하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보까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정도만 이야기하겠다.
1. 그런데 말이야.
몇 년 전부터 보까시란 표현이 묘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한국에 유입되어 사용되던 과정 자체가 좀 묘하긴 했지만 요 몇 년 전부턴 더 묘하게 쓰인다.
경고 : 이하 내용에는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뻥이 아니라 정말 부적절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른에게도 부적절할 거 같네요.
접기
남성기:잦이를 입으로 애무하는 사까시와 여성기:봊이를 합성하여 봊이를 입으로 애무하는 행위를 보까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음, 매우 알기 쉬운, 합리적인 합성어이다. 하지만 이전에 전혀 다른 용도로 보까시란 표현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선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말이야.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너 이 새끼 왜 이렇게 보까시를 못 해." 혼나면서 엎드려뻗치고 각목으로 엉덩이를 두들겨 맞고 그랬었다고. "다음주에 보까시 못 하는 놈들은 죽여버린다."는 협박도 들었고 "야 오늘 우리집에 모여서 다 같이 보까시하자."하며 의기투합했었고 "나 정도면 보까시 잘 하지 않냐."며 자기가 보까시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그랬었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보까시란 단어의 '뜻 2'가 '뜻 1'보다 대중적(최소한 인터넷 상에서는)으로 사용된다면 내 기분이 어떻겠냐 이거죠 아놔.
일종의 보까시 그림.
낱말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니 자신이 알던 용도와 전혀 다르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놀라거나 노여워해서는 안 됩니다만...
작년에 여러사람 바보인증시킨 꿀벅지 논란도 그렇지. 그게 꿀봊이가 어원이라던데 난 온갖 방탕한 웹 공간을 싸돌아다녀도 긴자꾸란 말은 존나 들어봤지만 꿀봊이란 말은 그리 널리 쓰이는 걸 못 봤다. 그래서 꿀벅지란 말을 들었을 때도 그냥 달콤한 허벅지려니 했는데 누군 허벅지가 봊이를 연상시킨다며 펄펄 뛰더라고. 좀 웃기긴 하다만, 뭐 어쩌겠어. 난 보까시란 단어를 보고 그라데이션을 연상시키고 누구는 봊이 빠는 걸 연상하는 거니. 사람마다 다 받아들이는 게 다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