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아 강 (2-3) 락운강촌
《 족쇄와 고삐》
회장 안국원의 주도, 은아와 나에게는 아주 치명적이었던 공유식이 다 끝나고, 회원들은 아지트를 떠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은아는 멍하니 앉아 벽만 처다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은아를 측은히 지켜볼 뿐이었다.
은아가 말없이 오토바이 키를 내게 건넸다. 나는 은아를 안아 일으켰지만 은아는 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몸과 마음이 허탈하고 아림이 심했으리라.
겨우 부축하여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돌아왔으나 다음 날 저녁때까지도 은아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했다.
걱정이 되어 나도 덩달아 외출도 않고 온 신경을 누나의 방에 집중했지만 밤이 이슥해져서야 은아가 내방으로 건너왔다.
“ 현아님, 죄송해요. 약속을 못 지켜줘서...” “ 무슨 약속이요?” “ 현아님에 대한 정조(貞操)를 반드시 지키려 했었는데....” “ 저도 이젠 알건 다 알고 있고 그래서 다 이해 해요.” “ 뭘 다 안다는 거예요?” “ 여성들이 운동권에 뛰어든 이상 정조는 이미 운동권 선배들의 것이라더군요. 그리고 이번엔 회장 동지의 작전이 워낙 치밀하여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왕 우리가 이 길을 택한 바에는 오히려 능동적 활동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자고요.”
“ 현아님,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정말 사랑해요.”
우리는 심신의 아픔을 그렇게 진정시키면서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침묵의 밤을 보냈다.
< 은숙의 '은아의 몰락'2 >
며칠 후인 11월 중순 쯤 '여명' 회장(안국원)이 은아에게 서울 지도원 선생님이 대표급 남녀 회원 각 한 명씩을 대동하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령이 있었다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성 대표로 선정된 한철수 회원과 함께
안국원 회장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을 줄 예상했던 지도원 선생은 30대 중반 정도였고
눈매가 날카로워 매섭고 음흉하게 보였다.
불광동 자그마한 한옥집에는 아무도 없이 아마 혼자 기거하고
있는 듯 커피를 직접 타 왔다.
인사 소개를 마치자마자 지도원 선생은 마치 급하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이미 안 동지에겐 전화로 이야기 했듯이 이번에 우리가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동시에 유신 계엄군에게 선제 타격을 가하기로 했소. 구체적 계획을 작전 보안상 전화상으로는 의논할 수도 없고 해서 급히 보자고 한 것이오.”
“우선 저의 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육군 항공대의 유류고와 항공기가
계류되어 있는 격납고는 고가초소 1개소에서
경계근무하고 있는데
심야에 우리 여성회원 두 명이 경계병 두 명을 대상으로
모포부대 역할(옛 군부대 울타리 개구멍으로 나오는 장병들을
대상으로 성 매매하는 매춘부의 별칭)로 유인하여 초소를 이탈하게 하고
그 사이에 남성회원 두 명이 울타리
개구멍(울타리 사이 허술한 구멍의 별칭)으로 침투하여 화염병을 투척,
유류고와 격납고(항공기 계류건물)를 전소시키려 합니다.
“ 가능할 수 있는 훌륭한 계획이긴 한데 문제는 여성회원들이 그런 모포부대 역할에 순순히 나서 줄까?” “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번 선생님이 지시하신 대로 무사히 S공유식을 마쳤습니다.”
안국원 회장은 안주머니에서 포켓수첩속의 사진 몇 장을 지도원 선생에게 건넸다.
선생은 한참이나 그 사진들을 유심히 살피더니 아주 잘 해냈다고 두 번이나 칭찬하고는 느닷없이 사진 한 장을 은아에게 내보이면서
“ 여기 이 여성이 은아 동지이지? 아주 명장면이구먼.”
그 사진은 얼마 전 공유식 장면으로 은아가 남성 회원으로부터 가슴을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 필름들은 은아를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꼬삐요, 은아에게는 족쇄(足鎖)가 되고 있었다.
서울서 돌아온 안국원은 남자 둘, 그리고 은아와 이성주를 선정하여 공대 폭파계획을 서둘러 추진했다.
다만, 안국원 자신은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종현에게 오토바이 운전 능력자임을 감안하여 은아 오토바이를 이용, 은아와 설주를 항공대까지 왕복시키는 임무, 특히 이 여성회원들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솔숲에 잠복하고 있다가 거사 후 신속히 탈주시키는 임무를 부여했다.
안국원이 부대 후배 면회를 통해 밤 23:00∼01:00 경계 근무병 2명과는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은아의 불빛 신호가 있자마자 그들은 고가초소를 이탈, 잽싸게 개구멍을 통해 은아와 설주를 부대 안 텅 비어있는 정비고로 안내하여 꽤나 매서워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을 유린하려 시도했으나 하지만 순간적으로 은아네의 거센 선제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사이
드디어 남성 회원들의 화염병에 의해 항공유가 대량 저장된 유류고와 격납고에 계류되었던 헬기(OH-23G) 두 대가 동시에 폭발되면서 항공대는 순식간에 화염 전쟁터로 변했다.
은아네도 놀란 척 미처 피할 엄두도 잊은 채 잠시 뭉게 먹구름 같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치솟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여명' 회원들의 신속한 탈주만 남았는데....
( 2-4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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