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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 달린 죄

락운강촌 2008. 11. 8. 09:21

눈 달린 죄

 

 아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한여름 저녁,

책 읽기만큼 느긋하고 즐거운 일도 없다.
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펼친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 유명한 첫 문단을 다 읽기도 전에 아내가 현관으로 들어선다.

 

아내는 밖에서 무슨 안 좋은 광경이라도 보았는지 가방을 내려 놓으며 투덜거린다.
 "제발 자기는 그러지 마."

나는 다음 문단을 읽고 싶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아내의 불평은 나의 독서를 가만두지 않는다.
"정말 꼴불견이야. 노출 심한 젊은 여자애들."

"놔둬. 남 옷 입는 것까지 참견할 건 뭐야."
"누가 그 이야기래? 그런 아이들 지나가면 넋 높고 바라보는 남자들 이야기지.

그것도 젊은 남자들은 안 그러는데 꼭 보면 중년 남자들이 그런단 말이야."


중년 남자는 읽고 있던 <롤리타>를 슬며시 덮는다.


 "고개까지 아주 꺾어서, 보면 목 부러질 것 같다니까. 그런 남자들 정말 저질이야.

제발 자기는 그러지 마. 사람 추하게 보인단 말야."


아내는 모른다. 내가 바로 그 저질 남자다.

나는 여자만 보면 눈이 저절로 따라간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여자가 좋다. 만약 그 여자가 노출이 심한 옷차람을 하고 있다면 더 그럴 것이다.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 그래, 자연스러운 거라니까.
"뭐 보려고 보나. 보이니까 보는 거지."

"그냥 보나? 고개까지 꺾어가면서 보니까 하는 소리지. 설마 자기는 안 그러겠지?"
 

아내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설마가 잡는 사람이 바로 나다.
세상의 반은 여자고 여자의 반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다.

그런 여자 앞에서 나는 눈 둘 데가 없다.

그렇게 훤하게 보이는 속살과 속옷이 아니고는 따로 눈 둘 데가.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옷차림도 노골적이다.

그렇다고 뼈를 드러낼 정도는 아니고. 살을 마구 드러낸다.
나는 동료의 살을 보는 내 모솝을 들키지 않으려 아예 동료 쪽은 쳐다보지 않고 대화를 한다. 이런 오해를 무릅쓰면서.
 "부장님, 지금 사람 무시하시는 거예요? 왜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회사를 나와서 전철을 타도 마찬가지다.

건너편 여자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다.

나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외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가 통한 것일까. 여자는 다리를 쩍 벌린다.
잠깐,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여성들의 옷차림에 대한 불평을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개성이 있고 자기가 원하는 옷차림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다.

 

나는 좋다. 사실 고마운 일이다.

내 이야기는 그런 옷차림을 바라보는 나 같은 중년의 시선에 대한 여성들,

특히 아내의 가혹한 시선에 대한 것이다.


그 처럼 남의 시선을 끄는 옷을 입고, 시선을 경멸하면 어쩌자는 건가.

물론 나도 안다.

그들이 받고 싶은 시선은 중년의 징그러운 시선이 아니라 청년의 싱그러운 시선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중년에게도 눈이 달려 있으니.

그렇다고 이 멀쩌한 눈을 뽑아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시내로 외출한다.

오랜만에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고 책도 사고 쇼핑도 할 것이다.

그런 곳에 가면 내 눈은 소리 없이 바쁘다.

속살과 속 옷을 보느라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아내가 본 것일까.
 "월 봐?"
아이들도 그런 내 모습을 본 것 같다.

고2인 둘째 녀석이 내 옆구리를 친다.
 "아빠, 좀!"


 

& 샘터 9월호에서 퍼왔습니다.  너무 솔직한 중노년 남성 얘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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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 촌 중 학 교
글쓴이 : 락운(14기 김영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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