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달린 죄
아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한여름 저녁, 책 읽기만큼 느긋하고 즐거운 일도 없다.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아내는 밖에서 무슨 안 좋은 광경이라도 보았는지 가방을 내려 놓으며 투덜거린다. 나는 다음 문단을 읽고 싶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아내의 불평은 나의 독서를 가만두지 않는다. "놔둬. 남 옷 입는 것까지 참견할 건 뭐야." 그것도 젊은 남자들은 안 그러는데 꼭 보면 중년 남자들이 그런단 말이야."
제발 자기는 그러지 마. 사람 추하게 보인단 말야."
나는 여자만 보면 눈이 저절로 따라간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여자가 좋다. 만약 그 여자가 노출이 심한 옷차람을 하고 있다면 더 그럴 것이다. 무슨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 그래, 자연스러운 거라니까. "그냥 보나? 고개까지 꺾어가면서 보니까 하는 소리지. 설마 자기는 안 그러겠지?" 아내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설마가 잡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여자 앞에서 나는 눈 둘 데가 없다. 그렇게 훤하게 보이는 속살과 속옷이 아니고는 따로 눈 둘 데가. 그렇다고 뼈를 드러낼 정도는 아니고. 살을 마구 드러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건너편 여자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다. 나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외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가 통한 것일까. 여자는 다리를 쩍 벌린다. 누구나 개성이 있고 자기가 원하는 옷차림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다.
나는 좋다. 사실 고마운 일이다. 내 이야기는 그런 옷차림을 바라보는 나 같은 중년의 시선에 대한 여성들, 특히 아내의 가혹한 시선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나도 안다. 그들이 받고 싶은 시선은 중년의 징그러운 시선이 아니라 청년의 싱그러운 시선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중년에게도 눈이 달려 있으니. 그렇다고 이 멀쩌한 눈을 뽑아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오랜만에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고 책도 사고 쇼핑도 할 것이다. 그런 곳에 가면 내 눈은 소리 없이 바쁘다. 속살과 속 옷을 보느라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아내가 본 것일까. 고2인 둘째 녀석이 내 옆구리를 친다.
& 샘터 9월호에서 퍼왔습니다. 너무 솔직한 중노년 남성 얘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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