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탄 수레 바위 전설
김영호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서일 마을에 본관이 ‘부산 동래’인
정 대감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부잣집이 살고 있었는데
수많은 식객들이 날마다 들끓었기에 이 식객들을 대접하느라고
엄청난 량의 쌀을 씻어 그 뿌연 쌀뜨물이 사∼오 리 정도나 떨어진
가사거리까지 흘러가 도랑이 마를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손님으로 북적대는 나날이 반복되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식객이 늘어나고 있어
손님 접대에 지쳐가던 안주인들과 머슴들이 내심 못마땅해 함은 물론,
아예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까지 하고 있던 차
어느 날 어떤 스님 한 분이 하룻밤을 묵고 가면서 수심이
가득 찬 안 주인에게 사유를 묻고는 식객이 많아 고달프다는 하소에
식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갔다는데.....
그 후 안 주인은 그 스님이 가르쳐 준 대로 정 대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아주 천천히 몇 달에 걸쳐 머슴들을 시켜
집 옆 샘밭의 큰 우물을 잔돌로 가득 채워 메워 버리는가 하면
덕탄강가에서 수레 바위를 찾아내
그 수레에 실려 있던 커다란 바위를 강물 속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과연 정말로 정 대감댁엔 해가 갈수록 식객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제야 안주인들과 머슴들은 심신이 편안해져 갔지만...
그런데 이를 어쩌랴.
식객이 줄어들면서 가세도 점차 기울어져 갔는데
정 대감 댁 뿐만 아니라 막고개 너머 여창이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동생마저도 함께 망해 가면서 어느덧 전설의‘정가터’란 지명마저
세월 따라 희미해져 갔는데
문제는 그 정 대감댁 문중만 망한 것이 아니라
서일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기울어져 우환이 빈번하고
호환마저 이어지는 등으로 점점 마을이 황폐해져 가는 데에 있었다.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연유가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남아 있던 주민들은 다시 서일마을을 일으키려면
덕탄강의 수레바위에 다시 짐을 실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고는 강물에 밀어 떨어뜨렸던 큰 바위를
찾고 또 찾았으나 너무도 세월이 많이 흐른 탓으로
도저히 그 바위를 찾을 수가 없게 되자 주변에서
큼지막한 바위를 찾아 잘 다듬어 수레 바위에 실어 주었는데....
과연 마을에는 다시 복되고 상서로운 일만 일어나게 되어
조선 영조 때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는 절골, 여창이를 병합하여
상서로울 서(瑞)자 서곡리라 명명하였는데,
마을 이름을 그 유명한 서곡대사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상서롭고 복된 일만 지속되라는 의미로 상서로울 瑞, 고을 谷자로 지었다고 한다.
이 서곡리란 마을 이름에 걸맞게 마을은 유구한 역사의 변천과 난관,
즉 조선이 망하고 일제 35년 치하를 거쳐
6·25동란 등의 난관 속에서도 주민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한 예로서 1950년도 초반 당시 한국전쟁을 겪는 등으로
국민 평균 수명이 42세에 불과했음에도 서곡 마을에는
환갑잔치를 하는 분들이 꽤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꼭 마가 낀다는 옛말도 있듯이
한국전쟁 휴전 직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1955년 가을경
누군가가 수레바위에 실려 있던 큰 바위를
또 다시 강물 속으로 떠밀어 버렸음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 큰 바위를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치워버릴 수 없음을 감안,
분명히 덕탄강에 소풍 왔던 자들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마을 청년들이 수소문한 결과
물걸리 동창 동네 청년들이 왔다갔음을 확인하고
동창마을로 찾아가 추궁하였으나
끝내 오리발을 고수하여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
한동안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1955년 늦가을에 결혼하고
다음 해 설날을 맞아 서곡마을 처가에 첫 세배 왔던
물걸리 동창 마을 거주 새 사위가 결국 자신이 한 짓임을 고백하면서
조만간 크게 사과하고 원상복구하겠다고 다짐했으니....
그 사연인즉슨
서곡마을에 이천 서 씨인 훈장이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들은 전쟁 참여 중 행방불명되고 서윤숙이란 딸이
혼기가 꽉 차 있어 휴전 직후부터 여기저기서 중매가 쇄도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피부가 박 속같이 희어
중국의 양귀비나 서시 같은 미녀들도 울고 갈 만큼
아름다웠는데
어쩌다 마을 밖으로 나들이라도 나가면
유부남들은 물론 심지어 할아버지들까지도 눈을 떼지 못하여
그 부인들로부터 혼찌검을 당하기가 부지기수여서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기에
동창 마을에서도 매파가 빈번하게 오가던 중
동창마을 서당 학생들이 가을 소풍을 맞아 서곡리의
그 소문난 처녀의 미색에 이끌려 서곡 서당 어르신께
인사 방문을 핑계로
소풍 장소로 덕탄강으로 설정하였는데
막상 덕탄강에 임하여 자기네들끼리 농주를 분음하면서
서로의 속내를 탐색해 보니 거의 모두가 그 처녀를 탐내고 있었기에
힘겨루기로 결판내기로 합의하고는
수레 바위에 실려 있는 큰 바위를 강물로 밀어내는 자가
석곡리 미녀에게 장가들기로 하다 보니
그 사위가 바위를 밀어내어 결국 장가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위는 서곡리 청년들의 추궁에 선뜻 나서서
자신이 한 짓임을 차마 고백하기가 힘들어 고민만 하고 있던 중
서곡리에서 시집온 미녀 아내가
“그 수례 바위에 짐이 없어지면 처가 마을이 황폐해져 가는데 뭘 망설이오?
당장 이실직고하고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난 친정으로 돌아가겠소.”라고
고향 동네 발전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자
결국 동료들과 함께 서곡 마을에 임하여 마을에 잔치를 베풀면서
크게 사과한데 이어 석공을 동원하여 큰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예쁘게 다듬어
실을載 수레車, ‘載車’라 새겨서 수레바위에 실어 놓았으나
글자가 전면에만 새겨져 있어 수례 바위 아래와 옆에서는
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며 다시 해 놓으라는 서곡 청년들의 요구에
더 큰 바위(약 450㎏)에 바위 아래와 옆에서도 볼 수 있도록
‘庚申年 三.三. 立 載車’라 새겨서 실어 놓아
서곡리가 더 큰 발전을 향해 약진하게 되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수례 바위에 짐을 실어 마을의 부흥을 기원하는
마을 주민들은 물론
아무리 여자는 출가외인이라지만
서곡리에서 자라서 시집을 갔거나 또는 외지에서 살고 있는
서곡리를 고향으로 둔 수많은 서곡리 출신 분들 모두가
서곡리의 발전과 평온을 한결같이 기원하는 애향심이
얼마나 투철한가를 가름하게 하는
아주 귀하게 간직해야 할 값진 전설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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