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생 연 분
6) 운명을 거역하고픈 처절한 절규
락운강촌
“오빤 그래서 나 만난 거 후회해?”
“후회는 안 하지만 내 능력상 너무 과분해서...”
“과분하다니 기분은 좋다. 여기 이거 한 쪽 마저 줄까?”
“싫어. 아까도 억지로 참았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니가 알기나 해?”
“난 뭐 안 그런 줄 아세요?”
윤옥이는 토라진 척 벌떡 일어나서 혼자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오전에 정말로 나는 점을 봤다.
어머니는 윤옥이를 나가 있으라고 하고는 나에게 세 개의 촛불이 타고
있는 상위의 정화수(井華水) 가운데를 응시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뭐라뭐라고 긴 주문을 외우셨다.
잠시 고요한 적막이 흐른 뒤 정화수 위에 안개 같은 여인의 형상이
떠올랐다.
앗! 화숙이(짝궁 화원이 여동생)가 아닌가?
“보여? 저 분이 천생연분이오.”
“그럼 저는 저 여자와 결혼하게 되나요?”
“우리 이승에서는 천생연분과 결혼해 사는 사람들이 절반도 안돼요.
천생연분과 살면 아주 잘 살고 뜻이 통하여 평생 부부싸움도 없겠죠.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천생연분을 비껴가기도 하고, 엉뚱한 배필을
만나 살다보면 나처럼 생이별도 하게 되는 거고, 끝까지 살게 되더라도
온갖 풍파와 갈등을 겪는 거죠.
그러나 저승에서는 또 더 미래 세대에서는
어차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게 되어 있겠죠.”
“그럼 저는 저 여자와도 이승에선 결혼 못 하나요?”
“두 분 의지에 달렸는데 이상하게도 닿을 듯 말듯 하다가 멀어지고 마네요.”
“결국 저는 어떤 배필을 맞게 되나요?”
“안 보여. 이상하게 안 보여. 대부분 보이는데...
아마 자네와 내가 윤옥이를 염두하고 있으니까
아예 그 대상이 가려지는 것 같아요.”
“윤옥이 천생연분은 보셨어요?”
“못 봤지요. 그리고 난 지금도 저 정화수 위에 누가 떠올라 있는지도 안 보여요.
지금 자네한테만 보이고 있는 거야. 또 윤옥이는 아무리 해도 안 보일 거고,
예수쟁이(기독교 신도 지칭) 한테는 절대 절대로 안 나타나죠.“
“저는 대학에는 갈 수 있나요?”
“원하는 대학에는 어렵겠어요.”
“직업은요.?”
“세 가지인데 지금 내 영상에는 비행기 같은 게 날고 있고
군인들 속에 자네가 있어.
그리고 또 옆에는 글씨 쓰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여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비행기로 외국을 왕래하는 일, 그리고 직업군인. 또 글을 쓰는 일, 즉,
작가나 공무원 중 한 가지가 확실해요.“
나는 속으로 '내 처지에 무슨 외국을 왕래 해?
군인? 그건 절대 아니다. 도저히 체질에 안 맞는다.
작가는 하고 싶기도 하지만 최소한 대학을 나와야 하는데
우선 원하는 대학도 어렵다지 않은가?
공무원? 그건 얽매이는 직업인데...' 라며
점 본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모두 불만족스러웠다.
결론적으로 결혼운에서는 윤옥이와도 안 되고, 천생연분과도 안 되고,
배필은 전혀 안 보이고, 대학도 원하는 대학이 어렵다 하고,
직업은 세 가지 모두 어렵거나 얼토당토않은 분야이고...
윤옥이가 믿지 말라던 말이 백번 옳았다.
그런데도 이미 내 맘 속에서는 그게 안 되고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 인생 절반 이상을 살아온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대부분..
아니 모두 윤옥 어머니의 예언이 다 맞아 왔다.
(윤옥이도, 화숙이도 나와는 맺어지지 않았고 대학도 그렇고, 특히 직업은....
군인이었으니...정말 틀려야 하는데 왜 맞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국민학교(초등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여동생이 몹시 아팠을 때 어머니가 소경 점장이를 데려다 굿을 하는데
새끼줄 사이에 끼워 있던 한지를 뽑아 똘똘 말아 땅에 놓으니 그것이 마구
뛰어 다니다가 점장이가 큰 소주병(대병이라 불렸다.) 입구를 가져다 대 주자
그 속으로 쏙 들어가던 장면은 너무도 큰 충격이기에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신기한 장면을 생각하니 점이 무조건 믿지 못할 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어쨌든 기분이 몹씨 안 좋았다.
하루 종일 그랬다. 낙산 해수욕장에서도 그랬다.
수영복 차림의 윤옥을 수영 가르친답시고 물위에서 마구 주물러도
바닷물과 함께 차갑게만 느껴졌으며 머릿속은 더욱 혼란해져 가고만 있었다.
저녁 식사도 생각 없다면서 형님이 설치해 준 텐트에 누워 있는데
윤옥이와 인순이, 그리고 사촌형님이 속초 대포항에서 사왔다면서 오징어 회와
소주, 샴페인, 과일 등 엄청난 먹을거리를 잔뜩 가져 오셨다.
차라리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고민을 잊고 싶었다.
형님과 경월 소주(70년대 당시 영동지방 특산품) 세 병을 먹고 나니
그제야 앞 바다가 좀 시원해 보였다.
석양이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동해이기에...
그래도 속이 확 트였다.
“오빠! 낮에 엄마한테 점보고 나서 기분이 안 좋은 거지?”
“그래. 네 말대로 안 믿으려 해도 너무 안 좋게 나왔어.”
이 말을 듣던 형님이 나를 나무란다.
“야 임마! 너 그걸 믿어? 하긴 강릉최씨 핏줄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가 무속인을 하고 있어도 우리 자식들은 항상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 과학 시대에 그 무슨 구닥다리 미신에 현혹되어 있냐?
야, 우리 기분 풀자! 내 연주하나 해 줄게. 노래나 불러라.“
형님이 가져온 기타를 치고 윤옥과 인순이 합창을 한다.
모두들 즐겁다.
나도 어울리기 위해 소주 한 병을 더 병째 마셔 버렸다.
" 어느날 여고 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변치말자 약속했던.."
"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윤옥이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서 함께 합창하고...
그제야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고 바닷가 캠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몇 시나 됐는지?
잠결에 윤옥이가 깨워서 보니 형님과 인순이는 집에 가고 우리 둘 뿐이었다.
"오빠! 좀 일어나 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윤옥아! 물 좀 있니?"
"아! 물이 없네. 어쩌지? 마실 거라곤 샴페인 한 병만 남았어."
"그거라도 줘. 목이 말라 죽겠어."
나는 윤옥이가 건네주는 샴페인을 반병이나 들이마셨다.
그제야 갈증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몽롱해지면서 나는 다시 잠들었다.
모기인지 뭔가가 깨물었는지 다리가 가려워서 깨어보니
담요는 윤옥이 혼자만 덮고 자고 있었다.
아마 내가 잠결에, 아니 술김에 내 찼는가 보다.
윤옥이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친모가 살아 있는데도 계모 밑에서 설움 받으며 자라선 어쩌다 처음 만난 남자인데
천생연분도 아니고 앞으로 맺어지지도 못한다 하고...)
잠이 깰까봐 살며시.. 정말 조심스럽게 안았다.
포근했다.
담요를 덮어서 포근한 게 아니라 윤옥의 가슴이 너무도 따스했고
약간의 시큼한 내음은 아까 마신 샴페인 같기도 했지만
아마 두 유방에서 품어지는 게 아닐까.
"오빠, 이제야 깼어?"
"아냐, 나 계속 자고 있어."
"ㅎㅎㅎ.. 잠꼬대 해요?"
우린 동시에 서로를 와락 껴안았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만 정적을 깰 뿐, 그 많던 갈매기도 조용한 밤.
서로의 숨결이 가빠지면서 내뿜는 숨결에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서로가 취해 가고 있었다.
"오빠! 힘들지? 사실 나도 못 참겠어요. 우리 그냥 저지를까?"
"안 돼! 아무리 참기 어려워도, 내가 강제로 덤비더라도 순결만은
너의 그 날 그 남편을 위해 끝까지 간직해 주길 바래."
"그 남편?? 그게 누군데?? 공자 말씀하시네요.
난 오빠가 엄청 좋아 할 줄 알고 크게 맘먹고 선심, 아니 봉사하고 싶은데.."
"미안해. 그래서 서운해?"
이미 내 손가락 끝에는 밀샘(蜜샘)에서 넘치는 뜨거운 용암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윤옥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내 그것도 주인 잘못 만난 안타까운
눈물방울을 찔끔 찔끔 흘리고 있었으리라.
"윤옥아! 여기 이 순간 더 극한 희열이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가
오히려 최고의 희열, 아니 행복이 아니겠니?"
"몰라. 나 못 참겠어요."
윤옥이가 정말 미치기나 한 듯이 천막을 뛰쳐나가 바닷물로 첨벙 뛰어 들었다.
나도 놀라 곧 뒤따라 밤바다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우리는 살갗에 소름이 돋을 때까지 뜨겁던 몸을 바닷물에 오랫동안 식히고는
오돌 오돌 떨면서 다시 담요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꼬옥 껴안고 밤이 새길 기다렸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형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데리러 왔다.
사실 아무런 사건이 없었는데도 윤옥이는 형한테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형님, 나 술이 취해 그냥 잠만 잤어."
"누가 뭐라더냐? 내가 물어보기라도 했어?."
"그런데 왜 아래 위를 훑어보고 그래요?"
"야! 너 임마, 너 너.. 너. 팬티라도 입어라. 그게 뭐니?"
"어?" 나 분명히 입고 잤는데?"
윤옥이가 외면한 채 먼저 정차되어 있는 오토바이 쪽으로 달려갔다.
난 분명히 바닷물에서 나와 젖은 속옷을 갈아입었었고
그냥 꼬옥 껴안고 있었을 뿐 팬티는 분명 안 벗었다.
그런데 왜 벗겨져 있지?
☞ 7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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