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 가축들의 영면을 빌면서
락운 김영호
구제역!
방역요원들은 신경안정제와 안락사 약물이 든 주사기로 소와 돼지를 죽인 뒤
비닐봉지에 싸 파묻는다.
주사를 놓은 어느 여성 방역요원은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며 울먹이고,
어느 부부는 기르던 소 100여 마리가 죽는 것을 지켜보며 "보상금을 받는다 해도
다시 송아지를 기를 염치가 없다"고 했다.
말없이 죽어가는 소의 눈망울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사람들 가슴을 후빈다.
어느 축산업자가 이미 텅 빈 축사의 먹이통에 늘 하던 대로 여전히 소 사료를 가득 채우는 장면에서
나는 가슴 밑바닥이 찢어지는 통증에 어금니로 눈물을 지그시 악물면서
저절로 그 옛날 소와의 추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아직 낫질을 못 배운 상태인 어린 초등하교 시절엔 소가 먹어야 할 꼴(소 먹는 풀을 꼴이라고 부름)을
벨 때 우리 소들을 먹이겠다면서 어른들 따라 한 움큼씩은 베어 오곤 했었다.
그때 벤 낫 자욱은 내 왼손 엄지 위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중학생 시절, 일찍 하교하는 날엔 자진해서 외양간 청소 후 풀을 베어 소들이 자는 바닥에
푹신하게 깔아 주었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아예 저녁 꼴 베는 일까지도 내 몫이 되어 있었다.
당장 내일 시험 보는 날임에도 어김없이 소 돌보기는 내 몫이었기에
자동적으로 골짜기가 엄청 많은 뒷산 쪽 어디(비석골, 산막골, 막고개, 방공호골 등
골짜기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음)에 소를 매어 놓았는지 물어보고는 지게에다
책 보따리를 매달고 산으로 올라가
송아지까지를 포함한 소 다섯 마리를 풀어 놓아 맘대로 풀을 뜯어먹게 한 채
꼴 다섯 단을 일찌감치 베어 지게에 얹어 작대기로 받쳐놓고는
적당한 소나무에 올라가 자리 잡고 가져온 책을 풀어 시험공부를 했다.
땅바닥에는 불개미들이 '저리 비키라'고 깨물어대기 때문에...
나무 위가 그나마 안전했다.
* 지금은 시골에서도 사료에 의존한 소 사육 체제이지만 60∼70년대만 해도 대부분 산과 들의 잡풀,
그리고 탈곡 후 남은 볏짚 및 옥수수섶 등으로 사육했고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화목용 가정이
대부분으로 산에 나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 많은 풀이 제대로 자라고 있어
소를 산에다 매어 놓아 산 풀을 뜯어 먹게 했음. 아마 이렇게 키운 소가 진짜 한우일 것임.
그러다 붉은 노을이 지면서 글씨가 어둠에 묻힐쯤 내 특유의 '음∼음머ㅇㅝ∼'를 외치면,
그러면 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멀리 있다가도 나에게 모여들고...
꼴지게를 진 채 어미소 한 마리를 끌고 오면 나머지 4마리도 자동적으로 집까지 따라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음∼음머ㅇㅝ∼'를 아무리 외쳐도 소들이
모이질 않았다.
당황했다. 늘 그래 왔듯이 당연히 모여야 할 소들이 안 보였다.
못 들을 리도 없었다.
산골짝 메아리는 생각보다 멀리 퍼진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만 퍼져가고 있을 뿐,
날은 점점 어둑해져 가고.....
골짜기마다 등성이마다 정신없이 헤매어 찾아 나섰다.
없었다. 소 발자욱만 흩어져 있을 뿐이고,
소들이 뛰어오는 소리 대신 보금자리 찾는 산새들만 분주하게 지저귈 뿐이었다.
한참 뒤에야 산자락에서 어미 소의 '음머ㅇㅝ∼'소리가 들렸다.
아!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러나 황급히 달려가 보니 어린 송아지는 쓰러져 있고,
어미 소는 어쩔 줄 몰라 송아지 주변을 맴돌고만 있었다.
쓰러진 송아지는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 겁에 질린 커다란 눈깔을 껌벅이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나에게 아직 솟아오르지도 않은 뿔을 부비며 어리광 부리던 귀엽기만 한 송아지였는데,
이제 어미 곁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소들의 발자국을 따라 산 아래 밭을 보니 송아지가 뜯다 만 옥수수가 있고
밭주인들이 김을 맨 흔적도 있었다.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 아버지가 이런 현장으로 달려 오셨다.
그리고는 용길네 집으로 달려가 추궁하여 용길이 동생 용석이가
옥수수를 뜯어먹는 송아지를 향해 돌맹이를 수없이 던져 쫓았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날 저녁,
용길이 아버지가 사죄와 함께 송아지 값을 가지고 와 건넸다.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자꾸 건네는데도 끝내 안 받으셨다.
그래서 그날 밤
양가는 의형제를 맺고 축하파티를 열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 소가 밤새도록 서러움을 토해 내고 있어 조용한 시골마을
구석구석 소 울음으로 메아리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양가 가족들은 친척으로 맺어지면서 막걸리 파티로 소 울음소리쯤이야
당연한 듯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임을 피해 외양간에서 어미 소와 함께 울었다.
그리고 다음 다음 날 밤,
아마 바람소리마저 달빛에 흡입되어 푸르게 가라 앉은 밤이었으리라.
자고 있다가 형수가 깨워 일어나 보니 왠 고기를 먹으란다.
쇠고기 - 그 당시 우리 산골 동네에서는 명절날과 동네 치성 드리는 날 외에는
고기 맛보기가 흔치 않았다.
(지금이야 시골에도 정육점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엔 장날마저도 귀했고,
있었다고 해도 비싸서 서민들로서는 감히 사 먹을 엄두를 못내 뚱뚱한 사람을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인가!
자다 방금 깨어났어도 그 귀한 쇠고기이기에 남보다 한 점이라도 더 먹겠다는
듯이 우선 허겁지겁 맛있게 씹고 있던 중 그제야 우리 죽은 송아지가 혹시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발 아니길...그러나 그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가 먹고 있는 쇠고기는 엊그제 죽은 우리 송아지였다.
분명히 파묻었다는데 동네 청년 몇 명이 작당하여 몰래 파헤쳐 요리한 것이란다.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아무리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급체!
소화제를 먹어도 침을 맞아도, 그리고 비상수단으로 그전에 돼지고기 먹고
체했을 때 효과를 보았던 돌가루(개울가 연한 돌조각 두 개를 마주쳐 부비면 생기는 가루)까지
갈아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 이후 군 훈련소 시절 굶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닥치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어
저절로 고쳐질 때까지 쇠고기를 먹기만 하면 체하여 그 흔한 '쇠고기라면' 조차도 못 먹었었다.
하지만 쇠고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쇠고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의 본향 농촌이 무너지고 있어 가슴이 메인다.
평년과 비교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일조시간과 저온으로 인한 냉해로 과수 / 채소 재배
농가들의 한숨에 이어 때아닌 집중호우로 김장배추가 녹아버리더니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토종벌이
씨가 마르는가 하면 이젠 구제역으로 키우던 가축을 살처분하기에 이르러
우리 농민들은 우울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이렇게 농촌은 쓰러지고 마는가?
농촌 피폐로 식량 파동이 일어도 중국서 수입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
그러나 몇 년 후면 중국도 농사지을 인구의 고령화에 따라 세계적 식량 무기화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서야 국가적으로 크게 후회할 것이 뻔하다.
미래 국가 안보는 국방만이 아니다.
식량 무기화 시대 도래를 내다본 보다 근본적 농촌 살리기 방안이 되길 갈원하면서
우선은 구제역에 감염되지도 않았으면서도 억울하게 살처분된 소를 비롯한 가축들의
영면(寧眠<사전에 없는 단어임>)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