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추억

아내의 암 투병과 귀촌 2)

락운강촌 2012. 5. 29. 11:28
아내의 암 투병과 귀촌

  (2)


 어쨌든 18일 간 쌓인 심신의 고통에서 다소의 여유는 되찾았지만 

아내 건강의 원상회복은 아직 어림없는 여건(6개월간 장루가 설치된 가운데

항암치료)인 가운데 


흰머리 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첨엔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어차피 삶의 흐름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듯이 

남은 6개월간의 항암치료를 소중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 뿐만도 아니고 5년간의 통원치료와 살얼음 딛듯 매사 조심조심.

맛있는 먹 거리도 참고 가려내야 하며 고향의 맑은 공기와 샘물을

가끔씩이라도 찾아야 하는 급변의 적응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장루(장 내강(腸內腔)과 외부를 연결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누공(瘻孔))

부착하고 있던 6개월간의 온갖 고역이야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철저한 의학 기술로도 조금씩 새어 나오는 악취는

족들의 밥맛을 잃게 하였고

특히 저는 아내 옆에서 잠자기도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만을 의지하는 아내이기에 끝까지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근속 30주년에 주어지는 부부동반 해외/국내 여행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소한 부부동반 회식마저도 저 혼자 쓸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갖 희생(?)


그런데도 수술 후 엄청 예민해진 아내는 늘 저에게 짜증만 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 “입원 기간 동안 다른 남편들은 하루 세 번 이상씩 와서 이상 유무를

관찰하고 담당 의사에게 별도의 봉투까지 내밀면서 아내의 완쾌를 위해

애쓰던데 당신은 와 보기는커녕 전화 한 번 제대로 해 봤느냐?

하다못해 통원치료도 남들은 남편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는데

나는 자그만 고물차(마티즈)를 직접 운전하고 병원에 가고 있다는  등등 -


심지어는 아주 옛날에 있었던 일들까지 들추어내면서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 - (이웅평 소령이 비행기를 몰고 귀순할 당시) 전쟁이

발발했다니까 부대 복귀차 문지방을 넘기에 나는 어떻게 하느냐며

다리를 붙잡으니까 뻥 차면서 아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뿌리치고

내빼던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 떨어진다는 등 -(하긴 잘못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반복해서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의사가 남편에게 당부하던 말- 환자는 다 완쾌된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언제든 재발할 우려가 높으니

어떻게든 무조건 마음 편하게 해 주라고....-

이 당부의 말 때문에 무조건 인내와 인내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래도 오냐 저래도 오냐 하니까 이젠 담배까지 끊으라고 했습니다.

사령관님의 금연 지시에도 차라리 명퇴하겠다면서 대항했었지만

환자인 아내의 요구에는 정말 큰맘 먹고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야 칭찬하데요.

하지만, 금단현상 때문에 이제는 제가 스트레스에 못 견뎌 하던 날,

술까지 끊으라는 강요에 누적됐던 울분이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뭐냐?

돈 벌어 오는 기계냐? 노예냐?

마누라 病食(암 환자는 채식 위주가 바람직하다는 의사 권유) 때문에

주말마다 먹어오던 맛있는 삼겹살마저 끊고

온갖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남편 노릇 해 오고 있지 않냐?


남들처럼 회식이 많은가? 노름을 하나? 골프를 치나?

남들처럼 유행 따라 애인이라도 있냐?

오로지 직장과 집만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인 걸 잘 알고 있잖은가?


남들처럼 철마다 새 옷을 사 입는가?

하다못해 속옷마저 몇 년째 헌 것만 입고 있는 이런 인생을

도대체 내가 뭐 하러 사는지 모르겠다.


오직 낙이라곤 스트레스 해소용 담배에다 저녁 식사 때 飯酒뿐인데

이마저 하지 말라는 것은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못 살겠으면 차라리 이혼하자.

서류 구비해서 갖고 오면 내가 얼른 도장 찍어 주겠다!


저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아내를 향해 한꺼번에 퍼부었습니다.


좀처럼 화를 안 내다 무섭게 돌변하니 아내와 딸들이 당황해서

모처럼 숙연해졌습니다.

오랜만에 피는 담배는 머리를 핑 돌게 했지만

그래도 비틀대면서 뛰쳐나가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빠른 속도로

마셔댔습니다.


한참 후 딸들이 쫓아와 함께 마시면서 저를 위로하데요.

- 아빠가 정말 고생하고 있음을 잘 안다고.. 그래서 불쌍하다고-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담배연기가 눈을 스쳤기 때문인 척 감추면서

저는 오랜만에 가족애를 새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마저 아내를 울게 하면 아내는 병이 재발해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못살 거야.)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결혼 후 한 번도 하지 않던 말이 ‘사랑해요’와 ‘미안해’였는데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도 잘못했다면서 울먹였습니다.


당장 다음 날, 아내는 저의 속옷부터 양복까지 풀세트로 사 왔고

담배도 술도... 그리고 주말마다 자신은 먹지 않으면서도 삼겹살을

구어 식탁에 올렸습니다.


아직도 아내가 완쾌 중입니다.

이제라도 오염된 공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했기에

휴가 때 경기도 충청도 강원남도 일대를 돌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지만 좋은 곳은 이미 값이 오를 대로 올라 경제적 부담 땜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중 이미 고향 땅에 살고 있는 막내처남으로부터

적당한 장소가 물색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소 비싸더라도

더 이상 망설이기만 할 수가 없기에 집 지을 장소를 확정짓고

처남으로 하여금 1년에 걸쳐 흙집을 짓게 했습니다.


아내는 1년간 새로 지은 흙집에서 텃밭을 가꾸며

맑은 샘물과 신선한 공기 속에서 1년 남은 투병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상의 별거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면서

남은 군 생활에 대한 유종의 미를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과 함께

1년을 보내고 전역일까지 남은 1년간의 직업 전환기간을

아내를 따라 귀촌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내 아내와 같은 이런 시련을 겪는 환자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를“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렀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 살 때부터

13년 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지냈으며,

또한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으로부터 계속 육체를 

공격당했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의 나이 마흔두 살 때

아사히신문사 공모 소설에 당선되어 일약 일본 최고의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78세로 운명했습니다.

그녀가 운명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은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다.”였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분,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

자녀, 남편, 아내로 인해 눈물짓고 계신 분들!


여러분이 갖고 계신 돋보기로 여러분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돋보기는 잘 안 보이는 신문의 작은 글자를 크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문제를 확대해서 크게 보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 때문에, 돈 때문에, 자녀 때문에,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확대 해석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확대해석은 여러분의 소망을 앗아가고 좌절감만 안겨줄 뿐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미우라 아야코의 마지막 유언처럼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일 뿐인 것을 기억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분들이 되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 3부에서 귀촌생활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