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민속 '서리'
♡ 잊혀져가는 민속 ‘서리’
넘어와 우리 옥수수 밭에서 ‘서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른바 옥수수 서리이다.
송아지들뿐만이 아니다.
태풍에 넘어진 채 그래도 후세를
남기겠다는 본능으로 열매를 맺는
옥수수를 너구리들이 낼름 갉아먹고,
고라니들은 아직 익지도 않은 고구마 잎사귀에다 벼 이삭까지도 뜯어먹는다.
이제 고고마를 수확할 때쯤 되면 작년에 왔던 멧돼지들이 아예 고랑을 팔지도 모른다.
요즘 30대 이하 분들은 아마 ‘서리’라는 개념을 이해 못할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떼를 지어 남의 곡식, 과일,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설명만으로는 젊은이들이 ‘서리’의 개념을 이해할 리가 없다.
하지만 ‘서리’는 조상님들 때부터 최소한 70년대 말까지도 명맥을 유지해 오던
엄연한 우리 고유 민속이었다.
늘 굶주려 있던 시절,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덜 익은 과일에서부터 닭까지 각종
먹을거리를 주인 몰래 가져다(훔쳐) 먹는데 대해, 후덕한 주인어른들이 배고픈 아이들의
귀여운 절도 행각으로(?) 그저 ‘안쓰러운 행위’ 정도로 용인해 오면서 이것을
‘서리’라는 하나의 민속으로 이어져 왔다.
내가 ‘서리’란 것을 처음 해 본 것은 초교 3학년 때로 기억된다.
한 동네에서 도보로 십리 길을 통학하던 동창생 우남이가 성냥을 보여주면서
콩서리해 먹자고 했다.
" 들키면 클나. 그냥 가자."
" 넌 나 하는 거나 보고 이따 맛이나 봐."
우남이는 앞뒤 옆 사방을 살피더니 느닷없이 길옆 밭에 가지런히 묶어 세워놓은
콩단 두 묶음을 고무신발로 세게 걷어찼다.
검정 고무신까지 벗겨져 날아갔는데도 유유히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신발을 고쳐 신더니 다시 한 번 더 걷어차서 앞으로 좀 더 옮기고는
" 야, 너도 한 단 들고 와!"
누군가 멀리서라도 지켜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우남이가 시키는 대로 콩단을 들고 최대한 잰걸음으로 인적 없는 산기슭 길에 접어들자
우남이는 콩 섶에다 그대로 성냥불을 붙였다.
타닥-타닥 콩깍지를 박차고 나와 콩이 익는 소리가 난 후
콩단을 자근자근 발로 밟아서 웃 불을 죽이고는 웃옷을 벗어 훌훌 부채를 날려
불티와 재가 날아가니 노랗게 익은 콩들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신없이 주어먹고 나서 서로의 얼굴을 보니 한 열흘 동안이나
세수 한 번 못한 놈들 같아 서로 웃고 떠드는데
저 아래서 콩밭 주인인 듯 한 아저씨가
" 이놈들 게 섰거라!"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오는 게 아닌가?
우린 잽싸게 고개를 넘어 골짜기 풀숲에 몸을 숨기고는
아저씨가 끝까지 쫓아오는 지를 지켜보면서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너무 크다고 서로의 입을 막아 숨도 못 쉰 채 이른바 철저한 매복을 섰지만
막상 숨을 고를 때쯤 우리는 더 이상 아저씨가 쫓아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말처럼 우리는 약 1주일 정도
늘 다니던 길로 가지 못하고 오 리나 더 먼 우회로를 이용해서 통학해야 했다.
아마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아저씨는 끝까지 추적하여 좀도둑을 붙잡아
경찰서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겁만 주려고 속리만 질렸을 뿐, 그대로 묵인해 주었기에
우리는 무사히 자라서 이젠 그 시절 추억을 그려보고 있다.
이후 서리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강원도 강릉에서의 곶감서리는 잊을 수가 없다.
농가 집집마다 사진에서와 같이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기 위해 줄을 꿰어 달아매고 있을 때다.
밤 서리는 보통 들키지 않기 위해 캄캄한 밤을
이용하는데 우리 4명은 아예 둥근달이 훤할 때를
택하였다.
우리는 그곳이 객지였기에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지만,
사실은 우리를 형이라 부르는 녀석이 짝사랑하는
처녀 집을 기웃거리다가 길 옆 감나무에 몇 개
달린 홍시를 따 먹고 있을 때 그 처녀가 나무 밑에
이르러 처다보면서 엄청난 쌍시옷 욕설을
퍼붓더란다.
그래서 그 집에 복수하자는 의미로 아예 드러내
놓고 서리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달밤을 택하길 잘했다.
긴 장대 끝에 낫을 동여매어 전통가옥 돌담 밖에서 처마 밑에 달아맨 곶감 다발을 걷어내고
있는데 방안에서 주인장이 "도둑이야!" 소리를 질려댔다. 이미 들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왕 골탕을 먹이러 온 목적이 있었기에 못 들은 척 걷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주인댁에서는 점점 작아지는 소리만 내지를 뿐 감히 쫓아 나오질 못했다.
하긴 달빛에 비친 낫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거리는데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쫓아 나올 수가 없었으리라.
우리는 유유히 1인당 한 다발씩 4다발을 걷어내어 뛰지도 않고 천천히
돌아오는 여유까지 부렸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이 심한 변비로 고생했고, 나는 설사로 며칠을 고생해야만 했다.
(원래 감을 한꺼번에 다량 섭취하면 변비가 당연한데 나는 이상하게도 반대 현상이 나타났고
그래서 그들은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란 곳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년들이고 그들은 경계 근무시 조용해야 하는
철칙을 무시하고 입대 전 무용담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약 45년 전 모 부대 김 상병은 입대 전 별명이 '서리대장'이었단다.
그가 동네에서 이름난 짠돌이 아저씨 밭 참외서리 하러 악동들 5명을 인솔하고 갔을 때
늦은 밤이라 원두막에서 코를 골며 자는 아저씨를 확인하고
먹을 만큼씩 들고 나오는데 악동 한 녀석이 원두막에 있는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고함을 지르며 도망을 치는데 잠결에 일어난 아저씨가 사다리가 있는 줄 알고
헛디뎌 원두막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 했었기에 경찰에 신고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끝내 신고는 않더라고...
그랬다.
그 시절 우리들에겐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절도’나 ‘도둑질’이라는
말보다는 비교적 그 느낌이 가벼운 ‘서리’라는 말을 즐겨 썼다.
이제는 '서리'란 말조차 사라졌기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가슴 두근거리면서 토종닭서리라도 한 번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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