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누님들과의 이별
은 아 강
(3-7)
락운강촌
@ 누님들과의 이별
그 매형이란 자는 내 앞에선 아무 소리 못한 채 평소 아내도 관리 못하는 주제에 평소 알고 지내던 우리 부관에게 그런 엉뚱한(?) 고자질을 했고, 부관님으로서는 평소 어린 놈이 엄청 선배인 자신보다 매달 업무 실적이 뛰어나 내심 질투를 느끼던 차 호기의 핑계거리가 생기자 본부 인사실무자와 협조하여 재빨리 나를 저 멀리 반대 방향에 있는 군단 직할반으로 보직 변경시키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잠시 누님 곁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자주 찾아뵙지만 못하였을 뿐이었고, 거의 주말마다 누님을 찾아 갔었고,
내가 ‘78년도에 결혼한 후엔 아예 다시 오게 되어 누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만 갔으며, 특히 제 처는 타향 객지에서 오히려 친 시댁식구들보다 누님을 더 의지하였고 누님도 친동생 이상으로 귀여워 해 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만남엔 반드시 이별이 있기 마련. 누님이 아프다기에 우선 군 병원으로 모셔다 무료 진찰 결과 조속한 큰 병원에서의 진단이 필요하다는 소견에 따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 정밀 진단 결과 누님은 이미 말기도 지난 자궁암을 앓고 있었다. (미련스런 누님은 그런 큰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작은 병원을 통원하면서 오히려 병을 악화시켰던 것이다. 똑똑한 누님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누님을 떠나보낼 때 누님은 남편과 아들딸이 자리를 비우자 나의 손을 꼬옥 잡으시면서 " 물론 내 동생들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연을 다한 후 저 세상에서는 내가 기다릴게. 우리 거기서는 부부로 만나자." " 그래요. 누님, 정말 사랑했어요. 먼저 가 편히 계세요." " 뭘 하든 열심히 하고 자식들 다 필요 없다. 부부가 최고임을 잊지 말고 아내한테도 최선을 다 해라. 항상 아내 그 자체를 인정해 주면 부부싸움도 없다."
내 인생의, 내 군생활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시고 내가 보답할 겨를도 없이 그냥 가셨다.
누님이 강제 저축시킨 돈은 내가 결혼 후 4년 만에 내 집 마련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었고 그동안 누님이 수집하여 제보해 주신 정보들은 나의 능력을 인정받게 했고 다소나마 군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부치지 못한 편지 5>
현아님, 아무리 저의 실체를 모른 상태이긴 하지만 어떻게 저에게 결혼 청첩장을 불쑥 내밀 수가 있어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축하한다는 말조차 잊고 멍한 상태인 저의 모습에 현아님도 겸연쩍어 하면서 부모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결혼임을 길게 설명해 주긴 했지만 그 말씀을 듣는 제 가슴속에선 하늘이 무너지면서 숨이 탁 막혀 왔습니다.
물론, 죽어야만 살아나는 사랑의 법칙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제가 이래선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요. 초는 자신의 몸을 녹여서 없앨 때만 세상을 밝혀 주는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소금과 설탕은 물이나 음식에 녹아 없어질 때만이 제 맛을 내게 되고, 땅에 떨어진 낙엽은 스스로 썩어 문드러져야만 새싹을 피우는 거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저의 님을 향한 사랑은 내 안에 든 이기심과 현아님을 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소유력을 끊임없이 죽여 갈 때에야 비로소 살아날 수 있는 것임을.......
하지만 저도 아주 평범한 여자이고 싶은 본능을 끝없이 짓눌러야 하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여자인가요?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키워야 했을 캠퍼스의 문화생활을 뒤로 하고, 겉을 가꾸고 속을 채워,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조각해야 할 유일한 적기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증오심과 적개심과 자기 기만으로 가득 찬, 한 이름 없는 소영웅에 매료되어 귀중한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으니.. 회한은 있어도, 복귀는 없는 인생행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회한’이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지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었어요. 스스로를 민주화투사라고 자부하면서 우리는 가장 비민주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던....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규범이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일체 무시하고 이념만 중요시했고, 이념 앞에는 귀중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을 쥘수록 권력의 노예가 되듯이 독선과 아집과 소영웅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었지요.
위대하지도 않고, 위대할 수도 없는 하찮은 나 자신을 ‘민중’ ‘민족’ ‘이념’ 같은 것에 동일화하여 자기 확대와 자기 최면을 통해 소영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소영웅주의에 빠져 행복감을 맛보아 온 저의 과거는 이렇게 무너져 내렸지요.
'동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진보'를 위해 용서와 침묵을 강요받을 때, 감히 여성 활동가들에게 '성폭력'은 어떤 '의미' 인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결국은 국가시설을 파괴하고 더구나 간첩을 돕다 나를 죽이고 쌍둥이 언니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여인잔혹사였던 은아의 삶을 님만은 결코 더 이상 무참하게 내버리지 않으시려고 죽은 자리 저 강 절벽에 ‘은아강’이라 새기셨겠지요.
제가 그런 현아님에게 더 이상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되기에 저 그날 3월 25일에 님의 결혼식을 먼 발치에서 비록 남몰래 눈물이 흐르겠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릴게요.
그리고 이제 저에게서 미련 접고 놓아 들릴게요. 님이 저를 찾더라도 다시는 님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생지옥에서 탈출할 때 뜻하지 않게 큰 폐를 끼쳤던..... 저에게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분.
그 김재경 씨가 종현씨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분 곁에서 하루 빨리 영원히 말없이 떠나라 하셨던 말씀을 이제부터라도 착실하게 실천하려 합니다.
저는 이제 현아님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겠으며, 저 대신 생명을 던진 은숙 언니의 뜻을 받들어 아들을 잘 키워 은숙언니의 시댁인 임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使命)만을 안고 남은 인생이라도 보람있게 살아가겠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를 진정 사랑해 주신 현아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정식으로 맞이하시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시길.... so long 아니고 good-bye입니다. 1978. 3월 13일 23:00 - 홍천에서 은아가-
부치지 못한 편지이기에 당시 은아의 이런 쓰라림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던 나는 사실 약혼녀보다도 오지 않는 은숙(은아)을 더 기다렸었다. 여러 여자를 거느리려는 원시적 사내의 유전 본능이었는지 약혼녀와 만나면서도 은숙의 품속이 그리운.... 정말 죄받을 원초적 사내 심보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후 은숙이와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월이 흘러 어느덧 어언 삼십년이 지난 2008년도.
그해 7월 18일에도 거의 매년 그래 왔듯이 은아강에 임하여 그날 하루만이라도 은아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가물가물해지는 은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마치 꿈속 처럼 정말 은아가 나타나고 있는게 아닌가?!
- 아니 정말 은아인가?
은아가 환생이라도 한 건가?-
@ 3-8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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