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 따라 흐르는 추억
도랑 따라 흐르는 추억
락운 김영호
고향 큰여창동 마을 도랑은 두 갈래로
하나는 마을 북쪽 산막골, 또 하나는 괘석골에서 시작된다.
옛날 그 산골짝 도랑에는 가재도 많았고
추운 겨울 가난한 동네 어른들이 좋아하는 산개구리도
바위 밑에 꼭꼭 숨어 경칩날
뛰어나갈 단꿈을 꾸고 있었다.
개구리 잡는 날
그날은 여느 날보다 찬바람이 더 매섭다.
아주 추워야 일손을 멈춘 형님들이 개구리 잡을 여유가 있었다.
장화도 없이 꺼먼 고무신 신은 채 시린 발을 동동 구르고
형님들이 주워 올리는 등이 시커먼 개구리들을 종대리키에 담는다.
형님들이 큰 돌로 바닥에 박힌 바위를 내리치거나
지렛대로 바위를 서너 번 들썩이면
자다가 놀란 개구리들이 웅덩이 물가로 기어 나오거나
흐르는 도랑물을 타고 아래로 도망간다.
더러 형님들이 못 보고 놓칠 때
위에서 보고 있다가 도피처를 알려 주느라 강추위도 아랑곳없다.
언제 해가 졌는지 어둑할 때서야 더 잡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올 때가 됐는데...' 하고 기다리면서 아버지가 지피는 아궁이
장작불이 눈앞에 삼삼하여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빠르기만 하다.
형님들 빠른 걸음에 뛰면서 뒤따르다 지쳐 헉헉거리다 보면
어느새 얼추잡아 오 리길을 달려 왔다.
밀주에 곁들인 개구리탕이 그리도 좋은지
아버지와 형님들은 오랜만에 흡족한 웃음이 함지박만 한데
도저히 맛없어 뒷다리 몇 개를 장작구이로 냄새만 피웠다.
그 도랑은 마을로 내려와
우리 집 바로 몇 미터 앞에 꽤 큰 웅덩이를 만들었다.
가재가 많이 살지만 물이 많아 감히 잡을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어느 형이 개구리 뒷다리를 막대기에 뀌어
가재 드나드는 굴 앞에다 대고 살랑살랑 흔들자
커다란 알가지 가재가 조심스레 나와서
앞발 집게로 집는다.
살살 막대기를 잡아당기자 물 밖까지 끌려나온다.
성에 안 차는 시간 때우기였지만 한동안 소꿉놀이는 가재낚시였다.
열한 살 여름 날 밤
열대야였던지 하도 더워 도랑 웅덩이에 나와 미역을 감는데
형수와 아랫집 새댁이 재잘거리며 목욕채비를 하고 다가온다.
잽싸게 옷가지를 주워들고 커다란 바위 뒤에 숨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스물 몇 살 새댁들이 홀랑 벗고 웅덩이에 폭 잠긴다.
바위 뒤 도련님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도란도란 은밀히 속내까지 다 들어내 속닥거린다.
백가는 3년 재수 없다는데도 신랑이
좋아 하냐고 묻고
다 큰 아기 같다며 더 좋아 한다는 대답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다.
그 웅덩이를 지나 내려가면 그 다음부터는 논이다.
가뭄이 심할 때 도랑물은 논물대기도 모자라 군데군데 웅덩이에만 물이 남아
미꾸리, 버드쟁이, 가재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물 한 모금이 아쉬워 뻐끔댔다.
조금만 가물어도 말라버리는 도랑물
하지만 홍수가 날 때는 논두렁을 넘어 논으로 물길을 내기도 한다.
엄청난 장대비 속에서도 넘치는 도랑물을 미처 못 당하자
희철 엄마는 커다란 흰 젖퉁이로 버티며 울상 짓기도 했었다.
이 논들은 더 아래로 물안골까지 이어진다.
아버지는 돈이 없었는지 몇 해 동안이나
집 앞 가까운 논이 아닌 꽤 높은 산 너머 물안골 논을 부쳤다.
빙 돌아 서너 배나 먼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지름길로 산 정상까지 두세 번, 정상에서 집까지 한 번을 쉬어야
지게로 겨우 한 짐 옮겨 오는데
아버지 혼자서 하루 종일 지게로 볏짐을 져 나르며 한숨 지셨다.
아버지는 가끔 족대를 메고 내게는 종대리키를 들고 따라오라 하셨다.
몇 번씩이나 아버지 따라 물고기를 잡다보니
어느덧 변성기도 지나 내 몸집이 켜졌을 때
아버지는 늘 혼자만 드시던 소주를 내게 나누어 주셨다.
소주 안주에는 꺽지가 최고다.
술맛도 모르던 놈이 꺽지 안주 때문에 한 잔 더 달라고
감히 빈 잔을 아버지에게 내밀 정도였다.
고기라고는 동네 치성 드리거나 제사 때,
그리고 어른 생일 맞아 키우던 닭 잡을 때에나
멀건 국물 위에 한 점 떠다니는 걸 구경만 할 뿐이었지만
아버지랑 민물고기 잡아 올 때는 큰 사발로 먹어도 고기가 남았다.
물안골 도랑 중간 쯤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는데
길 위에서 ‘아가야!’하고 부르면 같이 ‘아가야!’ 따라 한다고 해서
아가바위라고 불리었다.
아주 옛날 아기가 그 바위에 깔려 죽어 어미가 부르던 외침이란다.
몇 십 년 타향객지 생활에 찌들어 어쩌다
고향 가면
그 때 먹던 민물고기 매운탕이 침 넘어가도록
그리워 어버지 대신 족대 들고 물안골 도랑에
가보니
물고기 잡는 사람 없어 억새풀숲이 우거져
오솔길도 간곳없고...
전봇대가 들어선 후로는 가재도 없어졌고
농약물이 흘러 버드쟁이도 미꾸리도 사라졌단다.
아가바위는 2차선 포장도로 개설 때 요란한 폭음만 울린 채
수천 조각으로 쪼개져 돌가루 되어 흩어졌단다.
마을 도랑이야 그래로이겠지 가보니
미역감던 웅덩이는 산사태로 메워졌고
물길은 내가 숨었던 바위도 타고 넘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개구리 잡던 산골짝은 남아 있겠지
옛 오솔길을 더듬어 오르려니
잡목과 솔밭이 우거져 마치 전방 민통선 윤형 철조망 같이 앞길을 막았다.
아!
젊었을 적 사진기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화백을 꿈꾸었더라면 그림으로라도 남겨 놓았을 걸.
누가 이렇게 변할 줄 알았는가?
몇 번이나 변한 강산을 어찌 되돌리겠는가?
내가 다시 태어나도 그 도랑을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