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
누님
樂員 김영호
저는 하사로 임관 후 요즘 말하는 ‘사고 우려자’, 또는 집중 감시가 요구되는
‘관심부사관’이었습니다.
부대 전입 후 2주 만에 항공부대 담당관으로 파견 보직되었는데
당시 매일 16:00 본부 부대장님이 주관하시는 결산 시마다 이른바
‘금일의 무실적 부대원’으로 지목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전 간부들 앞에서
얼굴이 벌개진 채 소위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고...
갓 임관한 하사로서 학교에서 배운 능력만으로는 어림없는데도 매일 보고서
1건 이상씩 작성하라는 무리한 목표를 부여받고 이를 달성 못해 매일 힐책받는
과정에서 우리 직장(부대)에 대한 실망과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자괴에 빠져 있는
가운데 퇴근해서는 항공 조종사들과 어울려 그들의 봉급만큼이나 많은 항공수당으로
사 주는 술을 엄청나게 퍼 마시고는 아무 접대부 등을 데리고 몰래 외박이나
하고...
심지어는 (아래 소개하듯이) 몇 번이나 다음 날 규정된 시간에 출근도 못해
부관님(상사)이 아침부터 인근 지역 여관마다 찾아 나서고, 반 사무실로 붙들려
와서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일요일에는 술집 아가씨 옆에 끼고 놀러나 다니고...
이런 문란한 사생활에 저축은커녕 술집마다 외상 빚만 쌓여갔지만,
4년간의 군 생활(의무복무)을 최대한 즐기고 제대하면 그만이라는 자포자기적
상태에서 도무지 나아지려는 자기 계발 노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긴 그 당시 저로서는 정신적 대혼란을 겪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 자퇴를 비롯 연이은 공무원 임용시험 실패에 고2 때부터 교제한 여친 절교,
기독교 신앙생활 포기에 이은 불교 신앙마저 포기, 기대했던 보안부대원 근무
초기부터의 실망 등
도무지 신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착각 같은 희망마저 포기했었으니.....
그렇게 타락한 채 늘 그래 왔듯이 아침 식사로 항공대 후문 앞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맨날 라면만으로 아침 식사를 하다가는
몸 버린다면서 밥 한 공기를 내 주셨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별도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가 제가 들리면 아무 때나
기다렸다는 듯이 차려 주셨기에 저는 마치 우리 집에서 출퇴근 하듯 매일
그 집을 드나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깊은 정에 몰입되고 있던 늦겨울 내 생일 날 저녁
그날 아침에는 간밤에 과음한 채 외박하다 늦잠으로 아예 출근도 못했는데
하필 그날 10:00에 본부에서 업무 감사 수검을 앞둔 전 직원 사격측정이 계획되어
있었기에 부관님은 저를 찾아 읍내의 각 여관을 수색했지만
저를 찾지 못한 채 본부에는 감기 몸살로 링거를 맞고 있다는
거짓 핑계를 댔고....
하지만, 오후 본부로부터 돌아온 대 선배 부관님으로부터 저는 엄청나게
얻어맞았습니다.
얼굴이 부어 오른 모습을 본 아주머니가 약을 발라 주시면서
도대체 왜 맞았느냐고 묻기에 마치 어린 유치원생이 엄마에게 이르듯이
울먹울먹하면서 사실대로 말씀드렸는데
" 어쩌면 우리 남편 하는 짓과 똑같으신가?"
" 뭐가 똑같아요?"
" 우리 남편도 군대 생활 할 적에 생일날 아침상을 차려 놓고 기다렸더니
외박하고 늦게 출근하고는 점심때에나 들어오기에 그때까지도 치우지 않고 있던
생일상을 뒤엎으며 대낮부터 부부싸움을 크게 하고 말았었는데
김 하사도 똑같다는 거예요."
" 생일 날 아침 남편 안 들어온 것 하고 제가 왜 똑 같다는 건지...전..도무지..."
" 김 하사 오늘 생일 아니어요?"
그제야 달력을 보니 그날이 내 생일이었다.
아줌마는 언젠가 내 생일을 묻고는 그걸 기억해 주신 것이다.
군대 와서 맞이한 첫 생일.
아침도 못 먹은 채 엄청 두들겨 맞고 뒤늦게 아줌마가 차려 주시는 생일상을
받고는 처량한 신세에 솟아오르는 눈물에 목이 메었습니다.
" 군대 생활이 생일 날 얻어맞기도 하는... 다 그런 거예요."
아줌마는 목이 메여 식사를 못하고 있는 저를 꼬옥 안아 주시면서 위로했습니다.
아줌마의 포근한 가슴에 안겨 있자니 있지도 않은 누나의 품속 같았습니다.
" 누님! 오늘부터 제 누님이 돼 주세요!"
" ?? "
" 제가 형도 있고 누이동생도 있는데 누나가 없으니 제 누나가 돼 달라고요."
" 그래. 나도 남동생이 없는데 그렇게 하자.
그럼 오늘 저녁엔 앞마을 친척들도 부르고 정식으로 의형제를 맺자."
저는 생일날 비록 부관님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지만
드디어 누님이 새로 생기는 경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향이 경상도이지만 서울말을 익혀 약간 볼륨 있는 애교스런 말씨
이름은 우연희. 나이는 36세, 적당한 키에 한복 입으면 어울리는 우아한 몸매.
아이를 셋이나 낳았어도 젊음 그대로를 유지하는 특수체질.
이런 여인을 누님으로 의남매를 맺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이 날을 기점으로 대단한 의미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누님이 생긴 후 제 인생은 저 스스로도 눈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확 바뀌게 되었으니..
누님은 지금까지 퇴근 후 무절제했던 저의 사생활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누님으로 모신 후 한 달여가 지날 쯤,
누님은 저를 앉혀 놓고 쌀 막걸리 한 잔 따라 주시면서 긴 훈계를 했습니다.
" 지금까지 지켜봤는데 동생이 꼭 우리 남편의 전철을 밟는 것 같아 내가 누나가
된 이상 도저히 그냥 간과할 수가 없다.
우리 남편도 매일 술 먹고 사고치고 술집 작부와 오입이나 하고 부대에서는 찍혀서
매년 진급에 누락되다 겨우 중사 만기로 제대해서 동생도 보는 바와 같이
지금도 저 모양 저 꼴이다.
제대 후 이 구멍가게 마저도 내가 하고 있을 뿐,
도대체 가정을 어떻게 꾸려 나가겠다는 구상도 없이 낮에는 이리저리 떠돌다
밤에 늦게 돌아와서는 술주정이나 하고 저렇게 산다.
너도 단기 의무복무나 하고 제대 한다고 하지만 인생이란 장담할 수가 없다.
장기복무가 되어 계속 군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제대하더라도 군대에서 충실한 생활습관을 가져야 사회에 나가서도
올바른 인생을 살게 된다.
오늘부터 식사는 물론 술은 되도록 우리 집에서 마셔라.
물론 공짜가 아니다.
네가 돈이 모이면 알아서 갚을 수 있는 만큼만 갚아라.
또, 술집 여자가 가끔 부대까지 면회 오는 것 같은데 보안관이 그러면
항공대에서 널 어떻게 보겠냐? 두려워하기는커녕 장난감 취급 받는다.
나도 몇 년 전까지는 군인가족이었기에 군에 대해 좀 아는데 보안관이라면
아무리 술을 먹어도 취한 모습을 보이면 일반 부대에서 얕본다.
그리고 너희 부관님을 그전부터 잘 아는데 이미 며칠 전에 부관님에게 너의
봉급에서 강제로 절반을 떼어서 적금 부으라고 부탁했으니 아마 다음 달부터는
너 그 실 수령액 갖고는 아마 엄청난 궁핍을 겪을 거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이제 사람답고 보안관답게 살자!
이 누나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랬습니다.
저는 옛날 그 적다는 월급에서도 절반이나 떼어 강제 저축을 해야 했고,
그 순간까지의 온갖 방종스런 생활에서 탈피되어 누님의 통제를 받는 착실한
동생이 돼 버렸습니다.
때로는 생활적 자유가 위축되어 '괜히 누님 삼았구나!' 하는 후회도 했었지만
점차 누님의 고마움을 절감하게 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누님은 항공대 후문 옆에서 구멍가게를 겸한 쌀 막걸리를 취급하면서 병사와
간부들로부터 듣게 되는 온갖 유용한 정보 자료를 적시에 제공해 주었습니다.
병사들의 애로사항들은 기본이고 전방 T탑 관리 소홀로 항공기 월선 우려 실태,
한전 고압선의 항공 안전장치 부실로 민· 군 항공기 비행사고 우려 실태,
P· X 관리병의 잔금 횡령, 병사들의 사제 우편물 이용 실태, 심지어는
유류 관리관의 항공유 부정 매각 첩보와 군량미 민간 유출 건 등등
이루 셀 수 없는 정보 자료들을 수집하여 꼬박꼬박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저의 본부에서는 이른바 무실적 부대원이었던 제가 갑자기 유용한.. 아니 성과
거양 보고서를 계속 상보하여 보직 첫 해에 연말 우수부대원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자 역시 대학 문턱에라도 갔다 온 자원이 뭔가 다르다느니 하면서 저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는데 이런 결과는 모두 누님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락운아! 항공보좌관(소령으로 항공대에서는 Ⅱ맨 역할)이 너 처음 보직 됐을 때
보안관 군기 잡겠다고 헬기(당시엔 OH-23G기) 탑승을 유도하고는 고의로
상하좌우로 아주 험한 곡예비행을 하여 네가 오줌까지 싸더라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너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냐.
내가 파악하기로는 술집 '춘천 집' 박 양이 그 보좌관 애인이란다.
내가 뒷돈 대 줄 테니 수단껏 그 얘를 꼬여서 보좌관 숙소로 처 들어가 당당히
네 애인이라고 소개해라. 그러면 아마 보안관 앞에서 화도 못낸 채 장교 자존심상
속으론 화도 못 내고 엄청 난처해 할 거다."
참으로 교활한 누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님이 시키는 대로 그 항공보좌관을 그렇게 골탕 먹이고는 당당하게
일침까지 놓았습니다. "감히 보안관을 오줌 싸게 만들어 놓고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도대체 비오는 날 O-1A기 운항했다고 서류 위조해 놓았던데
그렇게 해서 남은 항공유는 어디 가 있는 겁니까?"
이후 그 분이 떠나실 때까지 그 분의 상관은 항공대장이 아니라 사실상
김 하사 저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알찬 보고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고, 유능한 간부로 평가받다보니
그제야 저는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 말에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듯이 약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제 신상에까지 변화가 생기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피곤해서 누님 집 아랫목에서 잠이 들었었는데
누님도 옆에서 잠들게 되고 잠결에 서로를 꼭 껴안고 자다가 이를 밖에서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매형(남편)이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중간에 잠이 깼었지만 저는 잠든 척 누님 가슴을 살살, 그러나 과감히 더듬기는
했고, 누님도 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제가 '헉' 숨이 멎기도 했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다른 핑계거리를 대며 술주정하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졌지만
그런 일은 늘 있어온 그네들의 부부싸움인 것으로 간과한 채
무심코 지내고 있었는데
며칠 후 부관님이 저에게
"너 누님인가 하고 간통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행실을 똑바로 해라.
내가 아예 본부와 협조해서 보직을 저 멀리 있는 군단반으로 보직 변경했으니
떠날 준비 하거라."
이게 무슨 억울한 날벼락인가?
그 매형이란 자는 제 앞에선 아무 소리 못한 채 아내도 관리 못하는 주제에
평소 알고 지내던 우리 부관에게 그런 엉뚱한(?) 고자질을 했고,
부관님으로서는 평소 어린놈이 엄청 선배인 자신보다 매달 업무실적이 뛰어나
내심 질투를 느끼던 차 호기의 핑계거리가 생기자 재빨리 저를 저 멀리 반대
방향에 있는 직할반으로 보직 변경시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잠시 누님 곁을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뵙지만 못하였을 뿐이었고, 거의 주말마다 누님을 찾아 왔었고,
제가 결혼한 후엔 아예 다시 오게 되어 누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만 갔으며,
특히 제 처는 타향 객지에서 오히려 친 시댁식구들보다 누님을 더 의지하였고
누님도 친동생 이상으로 귀여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만남엔 반드시 이별이 있기 마련.
누님이 아프다기에 국· 벽제병원으로 모셔다 진찰 결과
조속한 큰 병원에서의 진단이 필요하다는 소견에 따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했으나 누님은 이미 말기도 지난 자궁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미련스런 누님은 그런 큰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작은 병원을 통원하면서 오히려
병을 악화시켰던 것입니다. 똑똑한 누님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누님을 떠나보낼 때 누님은 남편과 아들딸이 자리를 비우자 저의 손을
꼬옥 잡으시면서
" 저 세상에서 기다릴게. 우리 거기서는 부부로 만나자."
" 그래요. 누님, 정말 사랑했어요. 먼저 가 편히 계세요."
" 뭘 하든 열심히 하고 자식들 다 필요 없다.
부부가 최고임을 잊지 말고 아내한테도 최선을 다 해라.
항상 아내 그 자체를 인정해 주면 부부싸움도 없다."
누님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제 인생의, 제 군생활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시고 제가 보답할 겨를도 없이
그냥 가셨습니다.
누님이 강제 저축시킨 돈은 제가 결혼 후 4년 만에 내 집 마련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었고
그동안 누님이 수집하여 제보해 주신 정보들은 저의 능력을 인정받게 했고
적지만 군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누님! 산소에 자주 찾아뵙지도 못한 채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저는 이제 정년 퇴역에 따른 직보반 입교를 앞두고
낼 모래부터 2주간 수원으로 사회적응교육을 갑니다.
누님 제삿날이 이맘때인데 불경스럽게도 날짜가 생각 안 나네요.
교육 다녀와서 명호(누님의 아들)에게 전화하고
제삿날 찾아가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