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고교시절 풋사랑 8)

락운강촌 2012. 5. 28. 18:19

 

 

 

 천  생  연  분

 

 

 

 

8) 운명은 뭐고 양보는 또 무엇인가?

 락운강촌

 

'홍시'란 노래 가사처럼 윤옥은 찬바람 들까봐 꼭꼭 싸 두었던 가슴을 헤쳐

내 얼굴에 살며시 대 주었다.

마치 엄마 같았다.

내 몸뚱이가 마술이 걸린 듯 갑자기 작아져서 눈감고 포근히 안기는 듯 했다.


"요 작은 님은 나만 보면 요렇게 단단해 져?"

"어차피 줄 걸 왜 안 주냐고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야."

"이번엔 뽀뽀까지는 해 줄게. 조금만 더 참아라. 응∼"

"정말 얘한테 뽀뽀해 주려고?"

"뭘 새삼스럽게.. 벌써 이번이 두 번째야."


아! 그랬었구나. 양양에서의 잃어버린 기억이 첫 번째였었구나.

잠깐이었는데도 더 이상의 인내가 어려워 나는 재빨리 쟈크를 올렸다.


"전번엔 꽤 오래 참더니?"

"그때 난 이미 술 취해 죽어 있었을 거야. 나 솔직히 기억도 안 나."

"아냐. 오빠. 그땐 정말 힘차게 솟아 있었어. 오늘은 정말 너무 아쉽다."


"윤옥아, 그런데 그런 거 나한테 해 주는 그거 다 어디서 배웠어?"

"책에 나와. '남자 다루는 법'이라고...오빠한테 처음 실험해 보는 거야."

"그런데 우리 남자한테는 왜 그런 법 가르쳐 주는 책이 없냐?"

"오빠가 몰라서 그렇지. 다 찾아보면 있어."

"그 책 나 좀 빌려 주라."

"빌려 주면 나 말고 누구한테 써 먹으려고?"

"뭘 써 먹어? 난 너밖에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정말 그랬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나를 다스리는 여자가 또 있을까?

물론 윤옥이가 처음이지만 이런 여자는 그 후로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윤옥이는 그날 이미 나를 강릉으로 보낼 준비를 모두 갖추고 나왔었다.

난 역시 먼 곳을 떠난다기보다는 오랜 만에 만난다는 기쁨과

그동안 잘 참아 줬다는 감사를 표하려고 나왔는데...

윤옥이는 앞으로 편지 왕래는 자기의 후배이며 내 친구의 여동생인 화숙이를

통해서 하란다.


"왜?"

"오빠가 싫어하는 계모가 오빠 앞에서는 교제를 허용한다고 해 놓고

지난번 화진포 다녀온 후로 음으로 양으로 나를 엄청 간섭하고 있어.

오빠 졸업식 때도 사실 얼마나 들볶았는지... 오빠는 알기나 해? 

내 예상으로는 우리 편지를 가로채거나 제대로 전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그랬었구나!(나는 정말 고마웠고 미안했을 뿐, 그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윤옥이는 이미 나와의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오빠. 나 사실은 화진포 엄마를 얼마 전에 만났었어.

내가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고 지금까지 오빠에게 엄마 점괘는 모두 미신임을

믿으라고, 사탄이라고 강요해 왔지만 사실은 나도 예감이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그래서 기왕이면 난 오빠가 미래에는 천생연분 배필과 맺어지길 진심으로 바래.

천생연분 누군지 알죠?"


"갑자기 왜 그래?"

“이 얘기는 엄마가 하도 당부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그때 엄마는 오빠에게 오빠의 천생연분 여인이 안 보인다고 했지만

사실은 뚜렷이 보시고 있었대.

모든 걸 엄마가 얘기 해 주었어.

그 여자가 누구냐고 엄마가 묻기에 후배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랬어.

그러면 너는 단언컨대 어차피 못 맺을 운명이니 네가 양보하라고...”

"양보?..."


"오빠가 그랬지? 진정 사랑하는 건 아끼고 보호하고 지켜 주는 거라고.."

"그건 남자가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라고 했지."

"여자도 마찬가지야. 난 정말 오빠를 사랑해.

그래서 진정 내가 사랑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판단하고 결심 했어요."


"그래서 결론은 오늘 마지막 이별이라는 거야?"

"아냐요. 내가 할 임무가 남았어.

 오빠가 천생연분과 맺어질 때 진정으로 축하해 주고 싶어.

그때까지는 내가 둘 다 성심을 다해 후원해 주어야 해."

".........................??"


울고 싶었다.

이런 여자가 어디 흔하더냐? 

정말 나를 이렇도록 사랑하는 여자가...

화진포 윤옥 어머니가 옆에 있다면 마구 대들고 싶었다.

왜 그런 얘기를 윤옥에게 했느냐고 원망하며 울부짖어 항의하고 싶었다.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 위로 매서운 찬바람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의 울분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윤옥이를 쓰러뜨리고 마구 짓눌렀다.


"윤옥아! 우리가 맹세한 것은 이게 아니잖아?

어떤 역경이 닥쳐도 우리 이겨 내기로 했고 또 그렇게 해 왔잖아?"


윤옥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외쳤다. 우리는 끝내 하나가 되리라고...

윤옥이 말없이 눈물만 주르르 흘린다.

마치 마지막 키스인양 우리는 진정 떨어지기 싫었다.

밀샘까지 손길이 닿으니 이미 내 몸을 기다린다는 정표가 흥건했다.


"나 너 가질래! 진작 가져야 했었지만 정말 너를 사랑하기에 참았었어.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 이런 나를 용서해!"

" 그래. 나도 몰라. 오빠 뜻대로 해!”


하지만 내 울분대로 윤옥이를 짓밟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나 나를 사랑하는데도 내 가슴의 침착과 이성이 몇 ㎝ 정도는 앞섰다.

당시엔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다.(물론 지금은 다를 뿐만 아니라 후회하고 있지만...)

그저 아까운 듯 그리고 엄마 젖을 파고들 듯 윤옥의 가슴에

오래도록 얼굴을 파묻고 울었을 뿐.


나는 윤옥을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다.

도저히 함께 갈 수가 없었기에....



강릉에서의 길고 긴 그리운 나날들.

우리는 고교 단짝 화원의 여동생 화숙이를 매개로 하여 그리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윤옥의 편지가 뜸해지고 대신 화숙의 편지가

더 많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의도와는 달리 윤옥이 차지했던 자리에 화숙이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쌓여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윤옥 언니가 전임 기독학생회 고교생부회장과 자주 만나고 있다느니

취업 공부중인 허용만(애초에 내게 편지 심부름을 시킨)과 만나고 있는 걸 봤다느니

하는 소식도 묻어왔다.

-윤옥이가 서서히 나와의 정을 끊기 위해 화숙이 편지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눈치 챘으면서도 질투심과 원망만 더해 갔다.-


화진포 윤옥 어머니를 혼자 찾아 갔다.

제발 윤옥이 마음을 되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간절히.... 


하지만 사람의 운명은 우리 인간이 애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윤옥이와도 값진 한 토막의 운명을 겪었으니 후회하지도, 미련 갖지도

말라는 설득만 당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다시 우리는 그 소나무 숲속에서 다시 만났다.


"윤옥아! 너 정말 왜 그러니?"

"오빠!  정말 반가워. 그런데 오빠야말로 만나자마자 왜 그래?"


무조건 껴안았다.

그러나 윤옥이 조용히 반항하면서 "아휴∼담배 좀 끊어라. 지독하네."

뭐, 담배?

지금까지 나 담배 피는데 대해 시비 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 여름인데도 평소 안 입던 바지에다 가슴과 어깨도

드러나지 않는.......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쳐 입고 나왔다.


"정말 준석이나 용만이 하고 사귀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고 사귄다기보다는 좀 친해지고 있어요."

"왜, 스스로에게 일부러 거짓말 하냐?"

"오빠도 화숙이 하고 친해지고 있잖아. 그리고 뭐 강릉서 여동생도

 사귄다면서?"

"네가 한 눈 팔고 있다기에 그냥 한 번 꾸며댄 거야.

 내가 너를 두고 누구와 사귀겠냐?"


가슴이 답답해 한여름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윤옥이를 꼭 껴안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나의 사랑 표현이었다. 

 

☞ 다음 마지막 이별인 9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