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오이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오이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작년에 오이 모종을 여남은 수 사다가 심어놓고 줄을 타고 올라가도록 막대기를
어른 키만큼이나 비스듬히 세우고 그물망을 씌웠다.
자식을 기르는 심정으로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다른 집 오이처럼 쭉쭉 자라주질 않았다.
본래 오이란 놈은 넝쿨 식물이라 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이놈은 어찌된 셈인지 도무지 줄을 탈 낌세를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모르나 싶어서 앞줄기를 잡아서 끌어다 놓았지만 하루가 지나면 또 방향을
밑으로 틀었다. 급기야는 모가지에 줄을 묶어 당겨서 그물 쪽으로 유도했지만,
줄을 타는가 싶으면 다시 꺾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또다시 매달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대가리를 더 세게 잡아 묶어서 줄을 당기니 넝쿨째 들려 올라왔다.
"이놈아 내일까지 안 올라가기만 해봐라.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거야."
며칠이 지나 가보면 그놈은 여전히 대가리를 거꾸로 처박고 아래로만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어쭈, 그래 좋다. 해보자 이거지?"
오기가 발동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지쳐버렸다.
"어차피 물건 못 될 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나의 오이 넝쿨은 청춘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비극적 운명 앞에
놓이게 되었다.
"불쌍한 오이야, 잘 가소. 다시는 이 세상에 오이로 오지 마라.
그리고 부디 나를 원망 말아라."
오이 넝쿨에 낫을 댔는데, 그 순간 넝쿨을 잡은 손에 묵직한 느낌이 왔다.
넝쿨 밑에 뭔가 소불알만 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참외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참외와 오이가 구분이 모호해도 참외 모종을 오이라고 판 모종집 아주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말 못 하는 참외의 목을 비틀었던 나의 무지도 무지지만 그 고통을 묵묵히 당해야 했던
참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거다.
"네가 아무리 모가지를 비틀어봐라. 그래도 새벽은 온다."
머쓱해진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미운 오리 새끼 같은 놈."
- 샘터 9월호에서 하도 공감이 가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