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다래나무 넝쿨
락 운 강 촌
우리 고향 마을 40여 세대주들은 60년대 당시엔 대체적으로 옛날부터 가난한
영세 농가들인데다 지역 내에 고등학교가 없어 도회지에 자녀들을 내보내 별도
하숙비까지 부담하지 않는 한 고등학교 진학을 대부분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산촌 마을에서 교납금 보다는 그 비싼 하숙비를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간혹 우리 부모님처럼 키우는 소가 한두 마리 여유가 있을 경우,
소를 팔아 도회지에 내 보내기도 하였지만 특히 60년대 후반에는 아무리 전국적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는 등 요란했어도 우리 동네는 4-H클럽 정도나 결성되었을 뿐
동네 경제 사정은 크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보통 자녀들을 겨우 중학교만 마치게 한 후
농사일을 물려받게 하다가 자녀들이 당시 유행하던 무작정 서울 상경 돈벌이에 나서면
그저 마지못한 척 적극 만류도 없이 가출을 눈감아주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느 비오는 여름 날.
이웃 마을 저쪽 끝에 사시는 분이 이쪽 끝에 사는 우리 집에까지 꽤 먼 길을
찾아오셨다.
1년간 한두 번 쯤이나 오실까 하시던 분이셨으니 심심풀이로 오신 것은 아니셨다.
분명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비오는 날이지만 바쁜 일 제쳐두고 오신 것이다.
우리 집에 남자 어른 손님이 오시면 아버지는 집에서 몰래 담근 막걸리를
정갈하게 차려오게 하고는 자녀들을 술상 옆으로 불러 손님에게 절을
올리게 한 후 술잔을 두 손으로 예의를 갖춰 한두 잔 권하게 하는 오랜
시골 예풍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집에서도 그래 왔었겠지만 아주 귀한 손님이 아닌 이상
한 동네 분들에겐 생략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그날도 난 그렇게 웃사랑방에 불려가 그분에게 절을 올리고 술잔을 권해
드린 후 다시 아랫사랑방을 거쳐 마루로 막 나오려는데..
도란도란 두 분들의 나누는 말씀이 내 발목을 잡았다.
“방금 왔다간 둘째가 학교를 마칠 때가 되었지요?”
“예, 내년에 고등학교를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궁리중입니다.”
“보내는 것이 좋겠지만 형편대로 하셔야지,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집 형편에 무리하지 말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닌가?
도대체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이 왜 여기까지 오셔서 내 진학을
방해하고 있는 건가?
얼핏 듣기에 나에게 아주 불리한 말씀들이 오가고 있었다.
귀를 쫑긋 세워 자세히 들었다.
도저히 어른들의 얘기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도덕적 규범에 얽매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창호지 문틈 사이로 두 분 말씀은 아주 또렷이 들렸다.
그 분이 또 말씀하시길..
“만약, 고등하교에 안 보내게 되면 약속대로 우리 여식(女息)과 빨리 혼인시키고
저 웃말에 내 땅과 집이 여유가 있으니 살아갈 자리를 마련해 줍시다.”
“아, 예! 전에 약속한대로 그렇게 해야지요.”
뭐라고? 그분의 여식이라면 2년 후배 현진이가 아닌가?
두 분이선 언제인가 나와 현진이를 맺어주겠다고 약속했었던가 보다.
그 당시만 해도 어른들은 자식들 짝 맺어주는 일이 인생사의 큰 관심사였다.
옛날 조혼 풍습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자신들도 그렇게 부모들이 정해 주는 대로 혼인을 해서 엉뚱한 배필을 만나
평생 살게 된 일말의 피해 보상심리에서인지
아직 어린 자식들을 두고 별의별 복안을 다 짜고 있었다.
어쨌든 두 분들 말씀대로라면 2년 후배이고 올해 갓 입학한 현진이가
앞으로 나의 배필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진이가 어떻게 생겼더라???
한 동네 살고 있었지만 고개 너머 저쪽 끝이라 왕래가 별로 없고,
학교 다닐 때도 남녀가 따로 피해서 다니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다음 날부터 등·하교 길에서 의도적으로 현진이를 자세히 살폈다.
우리 동네 1학년 여학생으로는 현진이와 진순이, 그리고 이름도 생각 안나는
또 한 명등 3명 뿐이어서 셋이는 항시 꼭 붙어 다녔다.
자세히 보니 현진이는 이미 조숙하여 교복 밖으로 뭉클함이 배어나오고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흰 살결은 아니었지만 시골티가 나면서도 나름대로
건강미가 피어나고 있었다.
앞서 가면서 “세 명이 꼭 붙어 다니니까 보기 좋다.”라며
말을 걸어 보았다.
“고마워요, 오빠, 그런데 오늘은 왜 오빠 혼자예요?'”
목소리도 내가 평소 바라던 대로 맑고 상큼하지가 않고
대신 약간 허스키가 섞인 애교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마 막내이면서 늦둥이로 성장한 탓이리라.
그렇다.
현진이는 당시 지금의 가수 이효리 모습 그대로였다.
수 년 전 이효리가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 ‘어? 현진이가?’하고 깜짝 놀랐었다.
그만큼 흡사했다.
가무잡잡한 피부며, 귀여운 얼굴형, 그리고 교복 밖으로 드러나는 볼륨있는 몸매...
목소리까지 쏙 닮았다.
처음엔 내가 그리던 소녀가 아니어서 내심 다소 실망했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쳐나고 있어 나는 점점 애가 타면서 목이 말라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여학생이 꼭 붙어 다니고 있어 말 한 번 붙여볼 기회도 없었고
학년이 다르니 학교 내에서도 그저 ‘미래의 내 여인이 완숙되어가고 있구나.'
하면서 남몰래 아리한 가슴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러던 여름방학 중인 어느 날 해도 지고 어둑할 무렵
소 꼴을 한 짐 베어다 놓고 집 옆 도랑 웅덩이에 서서 쪽박으로
머리에서부터 알몸에다 찬물을 뒤집어쓰면서 노천 샤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맛!’ 하면서 누군가 옆을 지나간다.
비눗물에 눈이 아려 겨우 실눈을 뜨고 보니 현진이가 아닌가!
옻이 올라 건너편 앞산 자락 약물에 씻으러 왔다 가는 중이었다.
- 앞산 자락에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얼지 않는 샘물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옻이 오르면 이 샘물에 와서 씻고 가곤 했었다.
현지이가 내 알몸을 보았다.
자세히는 못 봤겠지만 나로서는 엄마 이후 처음 이성에게 알몸을 보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함께 잠 자야 할 미래 낭군의 알몸을 미리 보여 주었을 뿐이니까.
다음날 당연히 마주치겠지 하고 그 시간쯤에 샘물가에서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괜히 꼴짐만 늦어 소들이 먹이 달라며 소리치고 야단이었다.
쑥스러웠을까? - 그러나 내가 노천샤워를 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던
현진이는 내가 샤워를 마칠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지나가면 되는데도
굳이 그 시간에 지나갔었다.
그러고서도 나타나지 않았다.(샘물에 한두 번 씻는다고 옻이 금방 낫는 건
아니고 며칠간 계속 씻어야 된다는데)
그러나 이틀인가 사흘 후
앞산 너머에서부터 꼴짐을 지고 넘어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어 샘물가에까지 왔을 땐 아직도 집에까지 500여m나 더 남아 있었다.
샘물가 다래나무 넝쿨 안에 들어가면 잠시 소나기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꼴짐을 내려놓고 샘물터로 갔는데 아! 거기 다래나무 덩굴 밑에 현진이가
먼저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하나님, 부처님! 그리고 산신령님, 이런 절호의 기회를 주시다니....
그러나 감사할 겨를도 없었다.
가슴이 너무 뛰었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르는 듯 했다.
“너, 거기 있었니?” 목소리가 내 의도와는 달리 떨리고 있었다.
“녜, 비가 올 줄은 몰랐어요. 오빠, 이리 들어오세요.”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고 다래나무 잎들도 그 비를 더 이상 막아주지
못해 현진이의 블라우스에 번지는 빗방울이 현진의 상체 맨살을
밖으로 점점이 드러내게 했다.
가무잡잡한 줄 알았더니 내 비치는 속 살결은 꽤 희면서도 발그레 했다.
“춥니?”
“녜, 아까 저 차가운 샘물로 씻었더니 좀 추워지네요.”
이럴 때 좀 더 어른스러웠더라면 내가 현진이를 자연스레 포근히 안아 주었겠지만
우리는 몸뚱이만 커 있을 뿐 아직은 어렸었다.
나는 과감히 비를 맞으면서 다래나무 덩굴 위를 얼기설기 엮고는
그 위에 꼴 지계에 묶여 있던 꼴단 두 더미를 풀어서 두껍게 얹어
아늑하게 지붕을 만들었다.
- 이젠 아무리 큰 비가 쏟아져도 물방울이 샐 리가 없었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소나기가 세차게 뿌려 댔지만 우리는 보금자리에
새들처럼 나란히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루루∼ 쾅쾅!! 천둥 번개까지 쳐 댔다.
이럴 때 영화에서 보면 여자가 '어마!'하고 비명을 내지르면서 남자 품에
폭 안기련만 현진이는 꿈쩍도 안했다.
그래서 물었다.
“무섭지 않니?”
“천둥이 어디 한두 번 치나요? 그리고 오빠가 곁에 있잖아요.”
(무슨 말부터 꺼낼까? 어떻게 이어가야 하나?)
“현진아! 학교서 집에 올 때 꼭 세 명이서 같이 와야 되니?”
“같은 반에 같은 마을에 사니 같이 가고 같이 오는 게 당연하죠.
그리고 저는 겁이 많아서 걔들 없으면 무서워서 혼자 학교 못 다녀요.
그런데 왜 .. 전에는 세명이 다니니까 보기좋다고 하고선....?
“음, 솔직히 말해서 너랑 단둘이 걸어보고 싶어서.....”
“호호...아마 그랬다간 우리 둘 다 당장 퇴학당할 걸요?”
이 애기 저 얘기 한참이나 오고 가면서 막상 말문이 트이니 우리는 이미 소나기가
그치고 그 어둡던 하늘이 잠깐 맑아지는 것도 모르고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마냥 속삭대고 있었다.
내가 두 아버지들이 나누던 혼인 약속 얘기까지 들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두워질 때까지 꼴 베러 간 둘째 놈이 오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찾아 나서다 꼴지게가 샘물가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샘물터로 쑥 들어오셨다.
“이 놈이 어디 갔지?” 하면서 다래나무 덩굴로 훑고 지나가는 아버지의 눈빛!
나는 나도 모르게 현진이를 꼭 품어 안아 숨기고는 다래나무 숲에 최대한 몸을 감췄으나
이미 아버지와 나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하여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야가 지게는 여기다 팽개치고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못 본 척 다시 나가 지게를 짊어지고 집으로 향하셨다.
휴∼
우리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면서도 꼭 껴안은 두 팔만은 풀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현진이 가슴 뛰는 소리와 함께 새근대는 서로의 숨소리가 거칠어져만 갔다.
아버지도 허락한 사랑.(이미 미래의 장인께서 청하였고...)
이제 무엇이 우리를 가로 막으랴!
"현진아! 아까 얘기 했고 방금 우리 아버지가 못 본 척하셨듯이
우리는 부모님들이 허락한 사이야."
"알았어, 오빠!"
"그리고 나 고등하교 가도 그리고 대학과 군대에 가도 꼭 너만을 사랑할게."
"그래. 오빠를 믿어. 또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만을 끝까지 기다릴게."
할딱이는 현진이의 가슴이 탄력 있게 내 가슴에 밀착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후에 현진이가 옻오른 피부병이 다 완치되었어도 다시 몇 번인가
이 샘물가 다래나무 넝쿨 아래로 찾아와 어둑한 배경 속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면서 미래를 거듭 거듭 약속했다.
어느덧 겨울방학까지 지나고 나는 고등하교를 다니기 위해
이불 짐을 어깨에 메고 형과 함께 홍천행 버스를 탔다.
밖에는 그냥 가게에 왔다 지나가는 척 현진이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예쁜 눈으로 윙크를 하고 지나갔다.
나는 형이 보든 말든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제발 끝까지 기다려 현진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오기까지 정말 현진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객지라서인지 모든 것이 낯설어 더욱 사랑에 목말랐을 것이다.
보낼 수도 없었던 편지만 자꾸 써 댔다.
공부는 언제 하고?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야 가슴 아림이 덜했기 때문에....
그러던 몇 개월 후 진학하지 않은 중학교 동창생 재석이의 애인이 되어 있는
현진이의 단짝인 진순이를 통해서 내 편지 전달이 가능함을 알게 되어
그 동창생 재석에게 보내는 편지에 현진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했다.
수십 회에 걸쳐서 보냈다.
(재석에게 뭐 하러 그렇게 매일이다시피 편지를 썼겠는가?)
그러나 단 한 번도 단 한 장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 ‘초조’란 단어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생겨났으리라.
정말 애가 탔다. 가슴이 저리고 아렸다.
그러나 휴일 날 달려갈 수도 없었다. 무턱대고 들이닥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지루한 반년이 지나고 여름방학을 맞아
현진에게 선물할 박계형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과 춘천여고생이 쓴
'살 어름을 딛는 소녀'를 품에 안고 집에 갔는데....
형수가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자꾸 망설이고 있었다.
형수는 이미 우리 둘 사이를 눈치 채고 있었나 보다.
“저....도련님, 현진이 얘기 들었어요?”
“아뇨, 전혀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형수의 말은 현진이가 늦봄부터 혼자 귀농한 이웃 노총각과 눈이 맞아
임신까지 하여 아버지한테 차라리 죽어라 두들겨 맞고 올캐와 함께
읍내 병원에 가서 몰래 수술까지 받았으며,
이런 일로 학교도 자진해서 퇴학했다고 했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란 말
난 아직 이런 말을 믿을 나이가 아니었다.
이런 말을 당사자도 아닌 제 3자로부터 전해 듣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이 그렇더라도 믿고 싶지 않았다.
재석이 애인이며 현진이 단짝 친구인 진순으로부터
내가 지금까지 보낸 편지는 "사실 처음 한두 통 외에는 더 이상 전해
줄 수가 없었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 이미 마음 돌아선 현진으로부터 "이런 걸 왜 쓸데없이 네가 전달해
주느냐?"는 핀잔만 듣고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면 실망할 나에게 차마 돌려보낼 자신이 없어
그냥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단다.-
전부 싫었다.
부모도, 고향도, 가족도, 그리고 샘물터 다래넝쿨도 모두가 싫었다.
방학 동안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면서 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런데 꽤 세월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다.
현진아!
너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고?
서울 00구 네가 살고 있는 집에 갔을 때
나에게 그 사연을 내게 편지로 보냈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편지는 또 어디에서 없어졌을까?
하긴 그 당시 네 친구인 진순이가 나에게 괴롭지만 잊을 수밖에 없다면서
내 등 뒤에다 대고 "내가 대신 기다려 줄게요!"라고 장난같이 쏘았던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 혹, 재석이와 사귀면서도 마음은 내게 있었는지도...
어쨌든, 너는 그 귀농 노총각도 아닌 처음 뵙는 서울 분과 결혼해 살고 있더군,
경영하는 가게가 썩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부디 힘내어
어렵더라도 오순도순 곱게 늙어 가시길 기원하고 있어.
다음에 언제 또 만날 때엔 지난 번 처럼 어색함 없이 그저 그냥 선후배의 반가움만 나누자.
그리고 제발 잘 살아라!
하지만 다래나무 넝쿨마저 없어지고 나도 가정을 꾸려 딸들이 시집갈 때가 됐는데도
내 마음 속 다래나무 넝쿨 가닥들은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어울어져
풀릴 줄 모르고.........
♡ 다음엔 9편에 걸쳐 고교생 시절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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